"휴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고등학교 시절, 방학이 다가오는 어느 여름날 엄마에게 여름휴가에 대해 물었다. 엄마는 휴가라는 단어가 애초에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알아듣지를 못했다. 그래서 더 자세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재차 물었다. 괜히 물어보았다. 휴가 같은 소리 한다는 핀잔만 들었다. 같은 반 친구 주연이가 강릉으로 여름휴가를 간다면서 나에게 “경혜, 너는 어디 가?” 라고 물은 것이 화근이었다. “글쎄…” 라며 아직 정하지 못했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과연 우리가 여름휴가라는 걸 간 적이 있었던가? 생각하게 되었다. 고등학생 나이로 약간의 눈치는 있었던지라 천진난만하게 계속 묻지는 못했다. 그래서 차근차근 말했던 건데 일언지하에 거절당하고 나니 약간 서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하지만 더 조르지는 못했다. 놀러 갈 형편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그때 아빠는 농부이면서 목수였다. 농부가 쉴 때는 목수로 일했고, 목수 일이 없을 때는 농사를 지었다. 시간의 빈틈없이 사는 건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농부의 아내이자 목수의 아내였으니 바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니 애들 데리고 놀러 갈 틈이 있을 리 없었다. 한 푼이라도 더 모아야 했으니 나의 부모에게 일은 생업이자 취미이자 여가생활이었다.
휴가 가자는 나의 말을 못 알아듣는 척했던 엄마는 아마도 아빠와 무슨 이야기를 했지 싶다. 얼마 후 우리 집에 ‘텐트’라는 물건이 생겼기 때문이다. 파랑과 연두가 어우러진 거대한 애벌레 두 마리가 거실 한가운데에 모셔졌다. 두 마리 중 조금 큰 애벌레는 텐트 천이고, 조금 작은 쪽은 뼈대라고 했다. 아빠는 코오롱 스포츠 매장에서 “월부가 아니라 한방에 샀다”라고 엄청 크게, 자꾸 말했다. 저 커다란 애벌레가 집이 된다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빠에게 내 불신은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곧 내 불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우리가 바닷가로 휴가를 갔고, 거기 모래사장에 텐트를 쳤기 때문이다. 와우! 여름휴가라니. 이거야말로 믿을 수 없어 볼이라도 꼬집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우리의 첫 가족여행은 불편한 것투성이였다. 텐트치는 것도 순조롭지 않았고, 모래 섞인 밥은 마지못해 먹었으며, 한 데서 자는 잠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아빠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차에서 쪽잠을 잤고 텐트에 남은 우리는 부대끼며 자리가 좁네 비뚜르네 꽁알거렸다.
그 이후 텐트를 친 기억은 없다. 아마 휴가도 그게 유일무이했던 것 같다. 내가 대학생이 되면서 엄마와 아빠는 돈을 더 벌어야 했고, 시간은 반비례로 더 부족했을 것이다. 나와 동생들이 대학 졸업 후 직장 생활을 하면서 형편이 조금 나아졌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남매가 다니는 직장은 공식적으로 여름휴가가 있었다. 옛날 주연이처럼 어디 가냐고 내가 묻고 다녔다. 결혼하고 아이를 기르면서 여름휴가는 일 년 중 중요한 일정에 속했다. 내가 클 때는 안 그랬지만 나의 아이들은 그렇게 되었다.
몇 년 전 여름, 아이들과 동해안으로 휴가를 다녀왔다. 속초와 강릉 일대를 돌아다니며 아이들은 바다를 마음껏 즐겼다. 아이들이 바다에서 물놀이하는 모습을 보며 옛날 내가 동생들과 첨벙거렸던 것이 생각났다. 더불어 그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엄마와 아빠가 함께 떠올랐고, 이제는 부모님이 마음 편히 여행이나 다니셨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아… 바라기만 할 것이 아니라 내가 모시고 오면 될 것이었다. 생각이 아니라 실천할 순서였다. 적당한 날짜를 잡아 숙소를 예약했고, 관광 일정도 짰다. 엄마와 아빠를 거의 납치하다시피 해서 속초로 떠났다. 엄마는 지나가는 말로 가자고 하는 걸 진짜로 갈 줄은 몰랐다면서 앞으로 2박 3일을 어떻게 보내냐고 걱정부터 했다. 아빠는 내가 운전하는 차 뒷자리에서 허허 웃기만 했다. 관광객이 많지도 적지도 않았던 딱 좋은 구경이었다.
“아이고 야~야, 이런 데도 있었나?” 제법 긴 감탄사를 여러 번 들었다. 나는 부모님에게 효도한다는 게 이런 건가 보다 싶어 가슴이 벅차올랐다.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딸내미하고 오셨냐며 사장님이 말을 붙이자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우리는 안 와도 되는데 얘가 억지로 데리고 왔다”면서 속에도 없는 말을 했다.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말이다. 이렇게 좋아할 거면서 그동안 왜 그렇게 안 간다고 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룻밤 자고 두 번째 날도 역시 즐거웠다. 그날 저녁은 속초 중앙시장에서 유명하다는 닭강정과 회를 한아름 떠왔다. 숙소에서 매운탕까지 야무지게 끓여 먹고 나서 아빠가 갑자기 집에 가자고 했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엄마는 한 술 더 떠서 짐을 싸며 오늘 꼭 가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다. 집에 가자와 안 된다는 말로 옥신각신하다가 내가 졌다. 엄마와 아빠가 이겼다. 그리고 우리는 야밤에 집으로 돌아왔다.
숙소 환불이 안 되어 체크아웃을 절대 못 한다고 버티던 내가 집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엄마의 울 것 같은 얼굴 때문이었다. 집에 가고 싶다고 조르는 엄마는 흡사 5살 아이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 표정에서 엄마와 아빠가 숙박을 포함한 여행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내 기억으로는 그렇다. 경조사 말고 여행을 위해 집을 비우는 일은 거의 없었던 분들이었다. 딸이 어렵게 마련한 시간을 즐겁게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도 깨달았다. 순간은 즐거웠으나 문득 불안한 마음을 감추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먹고, 놀아본 사람이 놀 줄 안다고 하는 말이 틀린 게 하나 없다. 이 상황에 꼭 맞는 말이었다. 그 뒤로 부모님을 동행한 여행은 늘 당일치기다. 잠자리가 불편하다느니 보일러가 걱정된다느니 하는 불안이 없는‘일일 여행’으로 우리는 휴가를 보내고 있다.‘휴가 같은 소리’를 하며 짧지만 자주 떠나는 여행이 우리에겐 안성맞춤이다
경기도 수원시 이경혜
이 글은 <행복한 동네문화 이야기 제166호>에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