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다이어트! 덜 먹기보다 배출에 집중하자 ! 무시할 수 없는 나잇살 나이가 들수록 몸무게가 점점 불어난다고 푸념들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갸름하고 날렵했던 얼굴선이 흐트러지며 볼 살이 늘어지고 이중 턱이 되는 것을 보면 그렇죠. 어디 얼굴 뿐이겠습니까? 가슴과 엉덩이도 탄력을 잃게 되며 발목과 장딴지는 굵어지게 되죠. 엉뚱한 체중감량을 하여 생긴 비참한 결과 이러한 변화에 자극을 받고 건강검진 결과에 체중감량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으면 즉각 다이어트부터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결심한 만큼 노력의 결과를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도리어 식사량을 줄였는데도 살이 더 쪘다거나 물렁살이 늘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이어트에 실패하는 진짜 원인은 따로 있다 핵심은 먹는 것, 즉 몸으로 들여보내는 것만 줄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몸속의 수분을 제대로 배출하지 못해서 살이 찌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죠! 이와 같은 경우에는 무리하여 먹는 것만 줄이려고 작정을 할 것이 아니라 먼저 몸속에서 수분이 원활하게 배출되도록 해야 합니다. 예를 들자면 비닐봉지에 물을 담아서 들어보면 물이 아래로 쭉~~ 몰려 주머니가 옆으로 퍼지게 됩니다. 또 비 온 뒤에 땅을 보면 움푹
K엄마! 독박육아 STOP! K아빠! 눈치육아 NO! 한국은 22세기에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없어질 나라 1순위입니다.(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인권문제연구소의 데이빗 콜먼)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도 이런 상황을 조롱하고 있는데 심히 마음이 불편합니다. 하지만 맞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극심한 저 출산율 (2023년 0.72%)때문입니다. 여기서 한국과 비교해볼 한 나라가 있는데 바로 프랑스입니다. 프랑스는 출산 장려 정책으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국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무엇보다도 출산에 대한 문제를 개개인의 문제가 아닌 국가의 문제라고 인식해 왔습니다. 물론 우리나라도 국가적 인식을 하고 있으나 결과에 있어서는 확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은 ‘더 이상 엄마의 독박 육아가 아닌,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 상황에서 아빠가 엄마와 함께 어떻게 육아 시간을 현실적으로 늘려야 하는 가’입니다. 그러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아빠의 육아휴직입니다. K아빠 육아휴직 VS 유럽 아빠 육아휴직 현재 한국 남성 육아휴직으로 2021년 기준 공식적으로 사용 가능 기간이 ‘52주’이지만 2022년 기준으로 육아휴직을 사용한 남성 비율은 28%
당신의 세포에 수분을 채워라!! 노화를 세포건조로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몸이 늙어가는 것, 즉 ‘노화’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노화는 건조로 이동하는 것이다·” 우리의 주변을 살펴보면 이 말을 더욱 실감할 수 있습니다· 싱싱한 사과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쭈글쭈글해지는 것과 싱싱했던 나뭇잎이 수분이 마르고 건조해지면서 부서지는 것도 노화에서 건조로 진행되어 간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몸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은 젊을 때 촉촉하고 윤기 나던 피부가 나이 들면서 메마르고 거칠어지고, 눈은 뻑뻑해지며, 손에도 촉촉함이 없어 침을 묻히며 책장을 넘기던 경험들이 있으실 겁니다. 뿐만 아니라 비만 오면 허리나 무릎이 아프고, 배와 턱에는 군살이 붙고,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조차도 떨어지는 현상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러나 노화는 겉모습 뿐 만 아니라 신체 내부적으로는 뼈, 혈관이 건조해지면서 다양한 질병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런 상태에서 건강검진을 하게 되면 소위 생활습관 병이라는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 등 혈관성 질환들의 검진 결과를 통보 받게 됩니다. 이와 같은 모든 결과들은 우리 몸의 세포가
‘안녕, 나의 한옥집’ 임수진 작가를 만나다 공주 한옥에 살았던 소중한 기억들, 구슬로 엮어 책으로! 공주에서 자란 저는 어렸을 때 책을 많이 접하며 이문구의《관촌수필》, 이미륵의《압록강은 흐른다》등의 소설들을 읽으면 항상 제 어린 시절이 오버랩 되었습니다. 제 이야기를 이것 못지않게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있었던 것 같아요. 무엇보다 어린 시절을 담은 소설들《작은아씨들》과《빨간 머리 앤》처럼 아름답고 반짝거리는 어릴 적 시간들을 담아내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저의 글재주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늘 생각만 하고 있었죠. 그러다 코로나를 겪으며 2020년 10월부터 블로그를 시작했어요. 반응이 즉각적이었죠. 신기하더라고요. 누가 내 어린 시절에 관심을 가질까 했거든요. 첫 번째 스토리는 한옥에 살 때의 뒷간(화장실)경험 이야기였어요. ‘그 시절 그 공간에 가 있는 것 같다’ 등의 블로그 이웃들의 댓글이 이어지면서 그 반응에 힘입어 계속 글을 쓰게 되었죠. 이런 향수가 저 말고도 많은 분들에게 있더라고요. 10회 글을 마무리 할 때 즈음, 입소문을 타고 ‘한옥일기 이야기’ 를 연재하는 제‘밤호수’블로그에 한 출판사 대표님이 찾아오셨어요. 글을
나전칠기의 아름답고 찬란한 세계를 보여주는 ‘휘향찬란’ ‘휘향찬란’ 나전칠기는 다양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조개마다 가진 다른 무늬, 빛깔, 패턴이 있기 때문이죠. 빛에 따라 아주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그 빛깔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휘향찬란’을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길을 향한 도전 사실 몇 해 전까지 저는 회사에서 회계 관련 일을 하던 3년차 직장인이었습니다. 하지만 회사를 다니는 동안 이 일이 나에게 맞지 않다는 생각을 마음 한편에 항상 가지고 있었죠. 그래서 나에게 딱 맞는 직업을 찾기 위해 베이킹, 가죽공예, 코딩, 일러스트, 포토샵 등 다양한 분야를 시도해보았습니다. 그러다 나전칠기를 정식으로 배울 수 있는 곳을 알게 되어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명장님들께 많은 조언과 사업적인 멘토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문화재수리기능사라는 자격증을 취득하고, 내가 만든 작품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싶어 프리마켓을 종종 나갔었는데, 그때마다 찾아주는 분들의 많은 응원과 관심 덕분에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원데이 오프라인 클래스, 온라인 클래스로 나전칠기 귀걸이, 머리핀, 키링, 그립톡, 커스텀 제품들
시는 세상으로 보내는 러브레터 풀꽃 시인 ‘나태주’ 16살 소년, 시인을 꿈꾸다 16세에 시를 쓰기 시작해 시인이 되기로 마음먹었어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외국 시인은 헤르만 헤세이고, 한국시인으로는 김소월, 윤동주입니다. 이 세 분은 상당히 비슷한 점이 있어요. 시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거죠. 사춘기는 말 그대로 인생의 봄을 맞이하는 시기인데, 그 당시 저의 집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집들이 살기가 어려워, 신분 상승과 돈과 권력을 쥘 수 있는 길을 가길 바랄 때였죠. 하지만 저는 권력과 돈을 추구하기보다 시인이 되고 싶었어요. 저희 부모님이 춥지 않고 배고프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사셨다면, 저는 그 위에서 나를 위해 살고 싶었고,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싶었어요. 아마 이 점이 저를 시인으로 이끌지 않았나 싶고, 시인을 꿈꾸게 했다고 봐요. 물론 제가 정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는가, 돌아보면 자신은 없지만, 제 인생의 목표는 16살 그때부터 지금까지 시인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혼자 하는 시 공부, 유일한 스승은 책! 제 평생 책 몇 권을 고르라면 지금도 이 책을 읽고 있는데 (직접 책을 보여주심)《당시, 唐詩》입니다. 당나라 시죠
밥 디자이너 ‘유바카’, ‘어린왕자 호텔’을 꿈꾸다 햇볕과 바람이 저를 키웠어요. 어렸을 때 학교 갔다 오면 가방을 집에 훅 던져놓고 밖으로 나갔어요. 거의 매일 들판에서 살다시피 했었어요. 꽃 보는 것이 좋고, 솔방울을 따고, 배추꽃 따 먹고… 햇볕과 바람이 저를 키웠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자연이 좋았죠. 물론 엄마가 들으면 서운하시겠지만요. 그렇게 늦게까지 밖으로 돌아다니다 집에 들어가면 엄마에게 혼이 나곤 했죠. 그래서 저는 초등학교 교사셨던 아버지의 퇴근을 기다렸다가 함께 들어갔어요. 아버지는 항상 저를 무척 사랑해주고 용서해주시는 자상하신 분이셨죠. 독수리 오형제, 둘째의 설움 극복 저는 다섯 형제자매들 중 둘째로, 예쁨을 받기위해 엄청 노력했어요. 눈치 백단에 솔선수범으로 엄마가 부르면 즉각 도와 드리고, 아버지 말씀도 잘 들었으니까요. 다른 형제들은 이래저래 예뻐하는 이유가 있어 일을 많이 시키지 않았는데, 유독 둘째인 저는 달랐어요. 입맛이 까다로운 아버지를 위해 엄마는 매일 김치를 담그면서, 그때마다 호출되는 건 저였죠. 김치를 담그고 6개나 되는 도시락을 일일이 싸기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으니까요. 덕분에 엄마의 오른팔 역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