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방향키를 돌고 돌리며… 얼마 전 100세 시대 관련 책을 읽다가 자신의 인생을 적어보라는 문구에 한번 정리를 해야지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이렇게 일본에서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와 인터뷰를 하게 되니 제 인생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네요. 일본에 대한 관심 어렸을 때, 친척 중 할머니 한 분이 일본에 살고 계셨습니다. 일본에서 온 선물을 받곤 기뻐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막연했지만 일본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또 터울 있는 큰 오빠가 여행사에서 사진사로 근무하는 것을 보며, 나도 대학가면 일본어를 전공해 여행사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전문 학원을 다니며 일본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그 당시(1982년)만 해도 일본에 대한 시선이 좋지 않아, 일본어를 공부하는 사람에 대한 시선도 따가웠던지라 책을 보이지 않게 커버를 씌워 들고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또한 지금처럼 미디어 자료도 많지 않아, 일본 영화를 접하기 위해 일본문화원에 가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 혹시 간첩 아닌가?’ 남편을 만나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한국중소기업의 금속기술 연구소에서 일본과의 기술협력을 위한 번역, 통역 업무를 했어요. 하지만 적
신뢰의 군불 지피기 43.5도씨. 현재 나의 온도. 당장 응급실에 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요? 걱정 마세요. 중고거래로 유명한 앱의 제 매너온도랍니다. 수년 전, 유명했던 한 중고거래 카페에서 아이폰을 구입하려고 한 적이 있었어요. 중고거래 경험이 별로 없었던 저는 순진하게도 판매자를 믿고, 물건을 받기 전에 먼저 돈을 송금했는데 보기 좋게 먹튀를 당했죠. 그 뒤부터 중고거래를 할 때 마다 또 사기를 당할까 늘 걱정을 하며 안전거래 결제 서비스 등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알게 된 앱인데, 동네에서 직접 만나 거래를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2020년 5월, 내게 잘 맞지 않았던 커블체어를 흐뭇한 가격에 판매한 게 첫 거래의 시작이었어요. 그 뒤로 주위 분들에게 거래를 부탁 받을 정도로 즐겨 사용하고 있지요. 아빠는 뚝딱 물건을 팔고 사는 제가 신기하셨나 봐요. 스티커를 붙여 내다놓아도 가져갈까 말까 한 책장들까지 팔아보라고 은근히 푸시하시더라고요. 물론 시행착오도 꽤 있었습니다. 보온용으로만 사용할 밥솥이라 저렴하게 사와 뿌듯해 했는데, 무료나눔 해도 시원치 않을 물건을 사왔다고 핀잔을 듣기도 했죠. 하여튼 내가 필요한 물품들뿐 아니라
엄마까지 감동시킨 나의 추억이야기, ‘17년 전’ 오늘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이 친구들에게 학교 신문을 가져 갈 사람은 가져가라고 말씀하셨다. 나의 글을 눈여겨 읽고 일부러 소리 내어 읽는 친구들이 나를 민망하게 만들어 살짝 미웠다. 학교 신문에 실린 나의 글 ‘사치’ 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글은 아니다. 멋진 친구들의 글 사이에 나의 초라한 글이 껴있으니 민망할 뿐이었다. 다른 친구들의 글을 읽다 딴짓할 겸 내 글을 펼쳐 읽어보았다. 그러다 예전 100일 글쓰기 활동 때 내가 썼던 글을 다시금 꺼내 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보니 괜히 엄마께 내 글을 읽어주고 싶었다. 그때 엄마는 엄마 미소로 나를 바라보며 내 글을 칭찬해 주셨다. 기분이 좋아졌다. 엄마의 칭찬 몇 마디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용기 내어 엄마께 나의 글을 보여주었다. 제목은 ‘17년 전’ 이다. ‘17년 전’ 이라는 글에서 내가 어릴 적 가족과 현재 우리 가족들을 함께 만날 수 있다. 울컥해 떨리는 목소리로 글을 읽기엔 부담스러워 엄마께 나의 글을 떠맡겼다. 엄마는 몇 자 소리 내어 읽으시다가 눈물을 흘리셨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덩달아 눈물이 나왔다. 추억 팔이로 나의 글 몇 개를 읽
[다문화, 너와 나의 이웃이야기 5] 다문화자녀교육 이전에, 부모교육 다문화가정 어머니들의 자녀양육을 위한 부모교육에 대한 요구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2021년 전국다문화가족실태조사 결과만 보더라도 학령기 자녀를 둔 다문화가정의 가장 큰 어려움은 자녀양육(88.1%)으로 드러났습니다. 다문화사회가 진전되면서 그간에 많은 연구자들이 부모교육 프로그램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고, 국가 예산을 투입하여 다문화가족지원센터 및 관련기관들을 통해 부모교육 프로그램이 지속적으로 실시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가장 큰 어려움으로 작동하고 있는지. 이 지면을 빌어서 오랜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고심해 본 진단과 함께 대안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결혼이민자 당사자의 자존감 부족 국제결혼은 결혼중개업을 통해 많이 이루어집니다. 상호간의 언어와 문화이해가 선행되지 않아도 쉽게 외국 신부를 맞아들이고 코리안 드림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결혼 이후의 한국생활에서 다양한 현실 문제를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전통적으로 대부분의 가정의 주 양육자가 어머니인 것은 국제결혼 가정이라고 예외는 아니기 때문에, 한국 사회 이해도가 낮고 한국어 능력이 미흡한 여
정조의 남한산성 답사 정조는 왕위에 오른 지 4년째인 정조 3년(1779) 8월 3일부터 10일까지 7박 8일 동안 답사(?)를 떠났다. 답사를 떠나는 첫째 이유는 여주의 한 곳을 특별히 들릴 목적이었다. 정조는 여주에 행차하여 신하들과 세종릉[英陵, 영릉], 효종릉[寧陵 영릉], 보은사[신륵사], 청심루[송시열] 등에 관한 말을 나눴다. 이 가운데 어느 곳이 답사의 첫째 이유였을까. 지금은 여주하면 세종대왕릉과 신륵사가 대표적인 명소이지만 정조의 나들이 목적은 효종릉 참배였다. 1779년은 효종이 서거한지 120주년 되는 해였다. 지금은 1백 주년, 2백 주년이 큰 기념일이지만 예전에는 60년, 120년 등 60주기가 의미 있는 기념일이었다. 정조가 효종릉을 찾은 것은 인조-효종-현종-숙종-영조-정조로 이어지는 왕통의 정당성과 인조반정의 대의명분이었던 사대주의 ‘존명배청’ (尊明排淸)의 확인 작업이었다. 병자호란 때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함께 봉림대군[효종]은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다. 나중에 돌아와 소현세자 대신 조선의 왕이 된 효종은 지난날의 치욕을 씻기 위해 청나라를 물리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정조는 영릉을 참배하러 가
한옥 유진하우스에서 에스토니아인들과 금(金), 금치체험을! “Tere päevast! (테레 파바스트!)”,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던 인사말 “어서오세요! 유진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우리는 처음 만나면“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하는데, 한 번 해볼까요?”했더니, 모두들 서투른 발음으로 안녕하세요?를 제각각의 억양으로 말한다. 그래도 잘 했다고 칭찬을 해 드렸다. 그럼 “에스토니아어로는 어떻게 말하나요?” 물었더니, “Tere päevast! (테레 파바스트!)” 라고 한다. 아이구 이제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던 인사말이었다. 어슬프게 따라 했더니 다시 발음을 한 번 하신다. 그들의 귀에 거슬리는 발음이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다른 나라 사람들의 간단한 인사를 따라하는 것조차도 쉽지가 않다. 말을 배우는 것은 단순히 단어 몇 마디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배워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국에 관심을 가지고 여행을 온 분들이 한국 음식에 관심을 가져주다니 그저 감사할 뿐이다. “우린 김치 안 먹고 살아요”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음식인 김치가 코로나를 겪으면서 세계 사람들에게 더 인기가 많아졌다. 그런데 우리는 외국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내 새끼 같은 고추(농사) 9월의 따가운 햇살에 붉은 고추를 말립니다. 한번 건조기에 들어갔다 나온 홍고추를 방수포 덮개인 가빠에 쭉 널어 놓습니다. 매콤한 냄새와 달콤한 냄새가 코끝에 와 닿습니다. 높고 푸른 가을 하늘과 따가운 햇빛, 맑은 공기, 풀밭에 널려진 홍고추는 나를 풍성하게 만듭니다. 손으로 휘저어 줍니다. 마른 것은 골라내고 아직 두툼한 것은 더 뒤적여 줍니다. 옛적 고추를 말리던 농가 어르신들의 풍경이 내 머리에 스치며 내가 그 모습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힘들어도 좋습니다. 절로 미소가 납니다. 풍성해진 것 같습니다. 마음이~ 하우스 옆 노지 100평에 고추는 5월 중순이 되어서야 평창 하우스에 본격적으로 심게 되었습니다. 아들 녀석이 병원에 한 달 반가량 입원하느라 돌봐주다 보니 어쩌다 뒤늦은 감도 없지 않지만 고추 모종을 사고 로타리를 치고 비닐을 깔고 한 주 한 주를 심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심는 것이 맞나 물어보며 고추농사에 처음 도전해 보았습니다. 고추농사는 손이 많이 가는 것 같습니다. 떡잎도 떼어주고, 얼마만큼 자라면 줄도 매어 줍니다. 1차 2차 3차 … 비바람이 칠 때면 쓰러질까 조바심으로 줄 한 번 더 매어 줍니다. 올해
[향을 전하는 허브스토리 2] 11월의 허브이야기‘Yarrow’(야로우) 학명 Achillea Millefolium Yarrow란 이름은 이 식물의 앵글로색슨 명인 ‘gearwe’, 네덜란드 명인 ‘yerw’의 사투리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는 ‘milfoil’이라 하는데 종명인 millefolium 즉, 라틴어의 ‘많다’라는 뜻으로 1,000을 의미하는 ‘mille’과 잎이라는 뜻의 ‘foliu’의 합성어에서 비롯된 것으로 톱니가 많은, 무수한 많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뜻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서양 톱풀’이라 불리고 있으며, 톱풀을 봄나물로 먹습니다. 서양에서 ‘야로우’는 학명인 ‘아킬레야’로도 통용되며 예부터 상처의 치료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관상용으로서 꽃빛이 아름답고 다양해서 화단용으로 부르는 이름은 ‘아킬레야’라고 하고 약용의 ‘허브차’(茶)로 이용할 때는 ‘야로우 차’(yarrow tea)라 하여 자칫 별개의 식물로 혼동하기 쉽습니다. 학명의 Achillea는 ‘일리아드’의 영웅 ‘아킬레스’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인데 ‘아킬레스’(Achilles)가 트로이전쟁 때 부상한 병사들의 상처를 이 풀로 고친 데서 붙여졌다 합니다. 아킬레스는 반인반
최강 약골, 드디어 달리기 시작하다 “아이쿠~ 발목아” 출근길 내려가는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서 또 오른쪽 발을 삐끗했다. 이번 발목 부상도 왠지 꽤 오래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저녁이 되니 발목이 퉁퉁 붓고 걸을 때마다 통증이 온다. 회사 근처 단골병원에 들러 X레이 사진을 찍고 진찰을 받았는데 선생님의 표정이 안 좋다. “이번에는 또 어쩌다가 다치셨어요? 자꾸 이렇게 다쳐서 어떡해요.” 발목에 인대가 또 늘어나 당분간 병원에 나와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발목 때문에 9개월 동안이나 도수치료를 받고, 치료를 받는 중간에도 괜찮아졌다가 다시 다치기를 반복하니 도수치료사 선생님도 이런 환자는 처음이라고 할 정도였다. 병원 직원들도 이제는 내가 병원 입구만 들어가도 알아서 접수를 해주었다. 발목 힘을 기르겠다고 산 마사이족 신발, 쿠션이 좋은 운동화, 발목을 잡아주는 운동화, 발목 보호대, 발 마사지기, 힘줄과 연골 강화에 좋은 건강식품 보조제, 염증 치료에 좋다는 강황가루 등 발에 쓴 돈만 해도 몇백만 원은 되었다. 거기다 9개월 동안 받은 도수치료와 병원비 약 값까지 1년간 쓴 돈을 합치면 몇 달치 월급은 훌쩍 넘었다. 원래 발에
[바다의 문법이야기 20]‘Per Aspera Ad Astra (역경을 넘어 별에 이르도록)’ 겨울 요트 여행기 (5) 새벽 5시, 배를 묶어둔 낚싯배에 인기척이 들려 잠을 깼다. 항구 안에는 아직 12월의 어둠이 가득, 미명도 느껴지지 않는다. 옆 낚싯배가 곧 출항을 할 것 같아 황급히 크루들을 깨우고 줄을 풀러 후진으로 요트를 뺐다. 깨자마자 잠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두꺼운 파카 하나만 걸치고 작은 항 안에서 출항하는 새벽 배들을 이리저리 피하며 요트를 조종했다. 안크루는 서둘러 기름을 넣고 조크루는 출항 준비와 함께 간단한 아침을 준비한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동이 트고 앞이 보여 드디어 출발이 가능하다. 모항항 입구 쪽에 암초가 있어서 암초를 피해 우회전 한 뒤 거리를 줄이려 섬에 붙어 전진한다. 파도는 어제보다 많이 줄어 마음이 편한데 물때가 문제다. 엔진을 3천 RPM까지 밀었는데 속도가 3.8노트. 2노트 가량의 조류가 배 전진 방향의 반대로 빠져나가고 있다. 이 속도로 가다가는 해가 질 때까지 목표하는 서해 갑문에 도착하기는 글렀다. 바람마저 정면에서 불어 세일도 쓸 수 없다. 이럴 땐 물때가 바뀔 때까지 인내하는 수밖에. 예측을 보니 정오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