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디자이너 ‘유바카’, ‘어린왕자 호텔’을 꿈꾸다 햇볕과 바람이 저를 키웠어요. 어렸을 때 학교 갔다 오면 가방을 집에 훅 던져놓고 밖으로 나갔어요. 거의 매일 들판에서 살다시피 했었어요. 꽃 보는 것이 좋고, 솔방울을 따고, 배추꽃 따 먹고… 햇볕과 바람이 저를 키웠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자연이 좋았죠. 물론 엄마가 들으면 서운하시겠지만요. 그렇게 늦게까지 밖으로 돌아다니다 집에 들어가면 엄마에게 혼이 나곤 했죠. 그래서 저는 초등학교 교사셨던 아버지의 퇴근을 기다렸다가 함께 들어갔어요. 아버지는 항상 저를 무척 사랑해주고 용서해주시는 자상하신 분이셨죠. 독수리 오형제, 둘째의 설움 극복 저는 다섯 형제자매들 중 둘째로, 예쁨을 받기위해 엄청 노력했어요. 눈치 백단에 솔선수범으로 엄마가 부르면 즉각 도와 드리고, 아버지 말씀도 잘 들었으니까요. 다른 형제들은 이래저래 예뻐하는 이유가 있어 일을 많이 시키지 않았는데, 유독 둘째인 저는 달랐어요. 입맛이 까다로운 아버지를 위해 엄마는 매일 김치를 담그면서, 그때마다 호출되는 건 저였죠. 김치를 담그고 6개나 되는 도시락을 일일이 싸기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으니까요. 덕분에 엄마의 오른팔 역할을
따뜻한 햇살이 담긴 ‘아로마테라피’를 만들어가는 ‘김봉실’대표 ‘아로마테라피’를 접하다 2000년, 미국 뉴저지 ㈜HERO USA 한국지사에서 Director로 2년간 근무할 때였어요. 자주 다니는 마트 옆에 미용학원이 있었는데, 한국에 돌아가면 피부샵을 열어볼 생각으로 주말 반에 등록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처음 아로마테라피를 알게 되었고 그 매력에 푹 빠져들었어요. 장장 1100시간이란 긴 과정의 교육을 마치고도, 부족함을 느낀 저는 뉴욕에서 전문적으로 아로마테라피를 실습하는 교육원을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아로마테라피의 핵심인 에센셜오일 블렌딩과 임상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을 수 있었죠. 이런 삶의 전환점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잠재의식에 의해 움직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제 경우는 조부님의 영향이 컸죠. 저의 조부님은 산에서 시조창(時調唱)을 하시며 약초산행을 다니시는 분이셨어요. 그래서 조부님의 사랑채 천장에는 한지로 봉해진 약초 봉지가 매달려 있곤 했죠. ‘에센셜오일’과 같은 일종의 약용식물에 대한 관심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이후 한국에 돌아와 한방건강학과에서 약용식물을 활용한 음식과 대학원에서는 자연건강을 전공
그림으로서의 그림, 우리 그림의 창의성으로 꽃피우다! 금영보 화가 “너는 그림을 해야 한다” 어릴 때부터 무언가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아무데나 낙서하듯이 그림을 그려 야단도 많이 맞았죠. 중학교 때 대전에서 아버지 고향인 옥천으로 전학을 갔는데, 방과 후 미술선생님과 항상 그림을 그렸어요. 선생님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도화지, 물감 등을 저에게 매번 챙겨 주셨죠. 그러다 고교 입학을 앞두고 누나가 살고 있는 서울 근교 안양으로 유학을 왔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즐겨 그려서인지, 미술시간에 선생님은 항상 저에게 “너는 그림을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죠. 그러던 어느 날 미술반을 활성화 시키고자 선배가 찾아왔고, 저는 미술반 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미술반은 풍경과 정물위주의 그림을 주로 그렸던 중학교 때와는 판이하게 달랐죠. 비율을 나누며 똑같이 그리는 석고데생을 처음 접하니 잘 하지 못했어요. 항상 잘 그린다는 말을 들어왔던 저는 자존심이 상하고 오기도 생기더군요. 바로 따라 잡으리라는 마음으로 노력한 끝에 인정을 받았고, ‘나도 미대를 가도 되나?’ 하며 진로를 결정하게 되었죠. 5년 넘게 그려온 그림을 다 소각하다! 그 당시 우리나라 미술계는
나를 위한 가장 멋지고, 훌륭한 선택!틈새 쪼개 70개국 여행한, 정금선 여행가 ‘내 딸이 선생님이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몸이 너무 약해 야단 한 번 들어본 적 없이 성장한 어린 시절. 부모님은 공부보다는 건강하게만 자라 줄 것을 바라셨죠. 뭐가 되겠다는 특별한 꿈은 없었으나 아픈 사람을 보면 간호사가 되고 싶었고, 장애인을 보면 그 장애인의 손, 발, 눈이 되고 싶었습니다. 무용 발표회에 가면 무용가, 바이올리니스트나 피아니스트를 보면 연주가, 미술 전람회를 가면 화가가 되고 싶었어요. 특별하게 잘하는 것이 없고 그나마 내가 남보다 잘하는 것 중 하나는, 한 번 자리에 앉으면 그 일을 마칠 때까지 있는 듯 없는 듯 혼자 앉아 끝까지 해낸다는 것이었죠. 서울로 올라와 대학 생활을 하면서 꿈이라기보다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어요. 하지만 이번에도 건강의 문제로 4학년 때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어요. 부모님 곁에서 교생실습을 하며 ‘선생님이 되자’고 저의 꿈을 굳혔습니다. 이런 저의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제가 선생님이 된다면 섬지방까지 따라오셔서 밥도 해주고 옷도 다려주신다 하셨죠. ‘내 딸이 선생님이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최고의 믿
일, 쉼, 놀이는 건강한 우리의 삶을 위한 삼위일체 ‘생활여가연구소’ 옥성삼 소장 “사람들이 일하고, 쉬고, 놀이하는 것은 각각 독립되어 있는 것 같지만, 우리의 삶은 어느 한가지만으로 이뤄지거나, 한 가지가 없어도 지속 가능하게 계속 유지 될 수 없어요. 일, 쉼, 놀이는 우리의 실제 삶을 이루는 기본요소로 서로 연결되어 상호작용을 합니다. ” 중2, 세상의 모든 짐을 짊어지다 돌이켜보면, 제겐 중2때 세상을 바라보는 뼈대가 거의 만들어진 것 같아요.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할지? 인생을 도덕적으로만 살아야하나? 하나님은 세상을 왜 만드셨지? 무엇을 하며 사는 게 재밌고 바람직할까?… 삶의 근본적인 고민들을 이때 참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중3때 뇌종양으로 쓰러져 7년을 누워계시다 소천 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께 “이럴 수가 있느냐”며 막 따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고민들이 제가 신학을 하게 된 계기이기도 합니다. 하여튼 그렇게 신학교를 갔지만, 그곳에서의 저의 모습은 한마디로 자유로운 영혼이었죠. 3년 정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제가 목사가 될 확실한 증표를 달라했습니다. 묵묵부답 이시길래 ‘아~ 이 길이 아니구나’하며 포기했어요.(웃음)
한옥에 현대적 숨을 불어넣다‘김원천’ 한옥건축가 회사명이 ‘참우리건축’인데요, ‘참우리’의 뜻이 무엇인가요? (양진용 학생기자) 참(旵)의 한자는 ‘햇살비칠 참’으로 날 일자에 뫼산이 아래 있어요. 2014년 한옥을 짓는 장인들, 건축가들이 모여 돈으로 일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사람을 위한 진짜 집을 지어보자는 마음에 ‘참우리협동조합’을 만들어서 출발을 할 때, 이 한자의 모양대로 산의 아주 깊숙한 골짜기 안까지 해가 닿는, 계곡 안쪽에 만들어진 동네를 생각하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현실의 벽을 통감하다 ‘참우리협동조합’은 5년 정도 운영되다가 현재 잠시 접은 상태입니다. 처음부터 협동조합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었으니 아쉬움은 없어요. 우리는 언제나 사회적으로 왜? 한옥이 없어지는지, 반대로 왜? 한옥은 남아있어야 하는지, 한옥이 꼭 옛날 방식이 아니어도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고민하며 일해 왔어요. 그래서 한옥에 살고 싶은 고객이 돈이 많지 않을 때는 우리 모두가 십시일반 힘을 모으고 지혜를 발휘해 벌고 싶고, 만들고 싶은 욕심을 조금씩 빼고, 줄이며 일을 진행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함께하는 장인분들, 건축가들의 삶의 방식이 다르고, 무
340년 전통 유럽 비엔나커피하우스 문화를 한국에 가져온, ‘정의석’ 대표 레드오션 커피시장에서 위기를 기회로 커피사업을 시작하다 비엔나커피하우스를 하기 전에는 홍삼전문 브랜드인 ㈜천지양 대표 등 다양한 일을 했습니다. 평소 커피를 무척 좋아해 관심을 갖고 임원진들과 머리를 맞대며 커피사업 구상 중에 본격적으로 2013년 3월 커피사업에 뛰어들었죠. 유럽 HoReCa(Hotel, Restaurant, Cafe를 포함하는 식품서비스 산업지칭)시장에서 No.1 브랜드인 ‘율리어스마이늘’ 브랜드에 대한 국내 독점판매권도 2014년 5월 어렵게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아메리카노 위주의 국내 커피시장에서 유럽 전통 시그니처 메뉴로 차별화를 한다면 레드오션 시장이지만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시작하게 되었죠.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비엔나커피하우스’로 상표권을 출원했다?! 무엇보다 국내 독점권을 갖고 있는 ‘율리어스마이늘’이라는 글로벌 브랜드가 있었지만, 유네스코 무형문화재인 ‘비엔나커피하우스’라는 상표도 같이 사용할 수 있다면 유럽 전통성과 역사성 그리고 문화적 가치를 기반으로 다양하고 특화된 컨텐츠를 상품과 결합시킴으로써 무한한 경쟁력을 갖게 될 거라는 확신이
대한민국 최초 돌솥밥을 만든 42년, 반야 돌솥밥 임복주 명인을 만나다 바람 든 무도 맛있게 조려내는 친정어머니 손맛 어릴 때부터 음식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우리 초등학교 시절에는 먹을 게 귀했잖아요. 요새는 설탕이지만 그때는 사카린 넣은 단물로 밀가루를 반죽해 세모 네모 모양을 만들어 검정 솥에 쫘악 깔고 불에 구우면 아주 맛있었어요. 요새로 말하면 비스켓인데, 이걸 만들어 먹다가 혼나기도 많이 했죠. 맛의 고장 전라도 전주에서 태어나 무엇보다 친정어머니의 음식 솜씨가 아주 좋았어요. 어머니는 바람 든 무 하나라도 맛있게 조려낼 줄 아는 손맛을 가진 분이셨죠. 종종거리며 잔심부름을 하면서 반찬마다 뭐가 들어가야 잡내가 사라지고, 또 뭘 넣지 않아야 풍미가 사는지 자연스레 익히게 되었죠. 이건 글로 배워서 되는 게 아니에요. 평생 삼시 세끼 내 손으로 담아내야 터득되는 것이죠. 친정엄마의 ‘양은냄비 밥’이 아이디어 24살에 결혼한 저는 시댁이 경제적으로 어려워 내가 나서서 집안을 일으켜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래서 음식 장사를 하기로 결정하고 식당을 차렸죠. 어떤 메뉴를 할까 고민하다, 지금 내가 제일 먹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봤어요. 그때
17세기 조선 여자 도공 백파선(百婆仙)을 이어 21세기 현대판 백파선을 꿈꾸는 ‘이혜경’ 대표를 만나다 여군 장교의 꿈 강원도 원주가 고향인 저는 고2 때까지 여군 장교가 되는 꿈을 가졌어요. 국군의 날 행사 때 군인들이 행진하는 모습이 너무 멋있었거든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육군사관학교의 문은 84학번이자 여자인 제게 열려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정치외교학과를 선택했죠. 제가 워낙 활동적인 성격이라, 이 길로 가면 당시만 해도 어려웠던 해외로 나갈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죠. 주위에서는 여자가 무슨 정치외교냐, 게다가 서울까지 보내 공부를 시키느냐는 등 말이 많았어요. 하지만 공무원이셨던 아버지는 요즘 세상에 남자, 여자가 할 일이 따로 있냐며 본인이 하면 된다고 저를 기꺼이 서울로 유학 보내셨죠. 지금 생각해도 아버지께 감사한 마음입니다. 세 딸의 열심당 젊은 엄마 대학 졸업 후, 중소기업에 들어가 1년 정도 직장 생활을 하다 공부를 더 하기 위해 국제정치학 전공으로 대학원에 입학했어요. 논문 학기에 외교안보연구원, 지금의 국립외교원 계약직 연구원으로 들어갔습니다. 당시 일본에 관심이 많았던 저는 일본어 공부도 하고 국제교류재단을 통해 일본에 방문
주체적인 삶을 사는 내가 바로 리더! ▲ 사람과 사람을 잇는 곳 / 한사람 한사람의 마음을 연결하는 곳 / 따듯한 온기가 머무는 곳 / 온마음을 다해 고객의 고유함을 찾아주는 곳 워킹맘 초창기 헤쳐나가기 저에게는 20년 동안 다닌 첫 직장에서 결혼과 출산을 거쳐 꾸준히 회사를 다닌 ‘1호 워킹맘 나영주’라는 상징적인 타이틀이 회사 내에서 있었습니다. 저의 윗 선배들은 결혼 후 아이를 낳으면 그만 두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죠. 그래서 후배들에게 육아를 하면서도 워킹맘으로서 삶을 잘 사는 롤모델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자연스러운 책임감 속에 20년을 다녔습니다. 제가 입사할 때 100명 정도였던 직원은 20년 새 4천명이 넘었고, 매출액도 350억에서 2조가 넘는 회사로 성장했으니 회사를 다니는 동안은 일이 너무 많아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보직도 생산, R&D 등 재무회계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일을 다 해본 것 같아요. 그 중 마지막 12년은 HRD부서에 있었습니다. 가장 많은 직원들을 상대하고, 다양한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우리 회사를 이끌어갈 리더를 양성하는 것이 저의 역할이었습니다. 세월과 함께 흘러간 리더상의 변화 제가 과장 정도까지 가졌던 리더로서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