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의 군불 지피기 43.5도씨. 현재 나의 온도. 당장 응급실에 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요? 걱정 마세요. 중고거래로 유명한 앱의 제 매너온도랍니다. 수년 전, 유명했던 한 중고거래 카페에서 아이폰을 구입하려고 한 적이 있었어요. 중고거래 경험이 별로 없었던 저는 순진하게도 판매자를 믿고, 물건을 받기 전에 먼저 돈을 송금했는데 보기 좋게 먹튀를 당했죠. 그 뒤부터 중고거래를 할 때 마다 또 사기를 당할까 늘 걱정을 하며 안전거래 결제 서비스 등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알게 된 앱인데, 동네에서 직접 만나 거래를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2020년 5월, 내게 잘 맞지 않았던 커블체어를 흐뭇한 가격에 판매한 게 첫 거래의 시작이었어요. 그 뒤로 주위 분들에게 거래를 부탁 받을 정도로 즐겨 사용하고 있지요. 아빠는 뚝딱 물건을 팔고 사는 제가 신기하셨나 봐요. 스티커를 붙여 내다놓아도 가져갈까 말까 한 책장들까지 팔아보라고 은근히 푸시하시더라고요. 물론 시행착오도 꽤 있었습니다. 보온용으로만 사용할 밥솥이라 저렴하게 사와 뿌듯해 했는데, 무료나눔 해도 시원치 않을 물건을 사왔다고 핀잔을 듣기도 했죠. 하여튼 내가 필요한 물품들뿐 아니라
[농사 커뮤니티 스토리] 스마트 팜부터 베란다 텃밭까지, 씨앗부터 수확까지 농사에 관심 있는 분들 파밍순으로 모이세요! ‘파밍순’의 시작 국제학을 전공하고 서울의 무역협회에서 일을 하다가 농업에 관심이 생겨 충청도의 농업회사로 이직하고 내려 온지 이제 2년차가 되었습니다. 다니는 회사는 종자를 판매하는 농업회사이지만, 파밍순은 회사와 상관없이 농업을 잘 몰라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며 운영해보려고 만든 커뮤니티 계정입니다. 저와 동료 모두 농업에 관심을 가지고 농업회사에 들어왔는데 전공이 아니다보니 배울 것도 많고 공부할 것도 많더라고요. 처음에는 농업인들에게 초점을 맞췄습니다. 농사일이 너무 바쁘니 농사 소식이나 바뀌는 제도 같은 것들을 모르실 것 같아 그날그날 나오는 농사 뉴스나 소식들을 올렸던 것이 시작이었죠. 파밍순의 계정 이름도 문자 그대로‘농사정보’였답니다. 본업이 따로 있기에 틈나는 시간을 쪼개서 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대충하는 것은 싫어서 콘텐츠 제작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어요. 주말동안 브레인스토밍 시간도 가지며 콘텐츠를 기획하고, 출퇴근길이나 식사할 때 제철 식단 등에서 영감을 얻기도 해요. 각자 고민한 콘텐츠에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틈날
엄마까지 감동시킨 나의 추억이야기, ‘17년 전’ 오늘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이 친구들에게 학교 신문을 가져 갈 사람은 가져가라고 말씀하셨다. 나의 글을 눈여겨 읽고 일부러 소리 내어 읽는 친구들이 나를 민망하게 만들어 살짝 미웠다. 학교 신문에 실린 나의 글 ‘사치’ 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글은 아니다. 멋진 친구들의 글 사이에 나의 초라한 글이 껴있으니 민망할 뿐이었다. 다른 친구들의 글을 읽다 딴짓할 겸 내 글을 펼쳐 읽어보았다. 그러다 예전 100일 글쓰기 활동 때 내가 썼던 글을 다시금 꺼내 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보니 괜히 엄마께 내 글을 읽어주고 싶었다. 그때 엄마는 엄마 미소로 나를 바라보며 내 글을 칭찬해 주셨다. 기분이 좋아졌다. 엄마의 칭찬 몇 마디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용기 내어 엄마께 나의 글을 보여주었다. 제목은 ‘17년 전’ 이다. ‘17년 전’ 이라는 글에서 내가 어릴 적 가족과 현재 우리 가족들을 함께 만날 수 있다. 울컥해 떨리는 목소리로 글을 읽기엔 부담스러워 엄마께 나의 글을 떠맡겼다. 엄마는 몇 자 소리 내어 읽으시다가 눈물을 흘리셨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덩달아 눈물이 나왔다. 추억 팔이로 나의 글 몇 개를 읽
가르치는 즐거움을 선사한 10반 꽃봉오리들에게 “어느 순간부터 학교를 옮기면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몇 명이나 있나? 그것부터 살피게 되었네.” 나를 아끼던 교장선생님께서 당신의 경험담을 말씀하시며,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승진 준비를 해놓으라고 조언하시던 게 생각나는구나. 더 나이 먹으면 학생들도 꺼릴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부담스러운 존재가 된다는 말씀이셨지. 선생님도 이번에 학교를 옮기면서 이 말씀이 쟁쟁했단다. 나를 반기지 않으면 어쩌나, 익숙하지 않은 업무를 맡아 쩔쩔매면 또 어쩌나, 한걱정이었지. 이십 년만 근무하면 그 다음부터는 ‘덤’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그에 따라 요구하는 삶의 무게도 보태져 꾸역꾸역 일을 헤쳐나가야 해서, 선뜻 일을 그만둘 수가 없었단다. ‘덤’마저도 더 달라고 보채는 형국이었지. 그리고 너희를 만났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고, 사소한 이야기도 크게 공감하는 너희를 보면서 이것이 하룻밤 꿈이면 어쩌나 밤잠을 설쳤단다. 어느 날은 나보다 더 나이가 많으신 선생님이 부임했다고 하면서 내가 맡은 과목과 업무를 다른 분이 맡아야 하니 내놓으라는 꿈까지 꿨단다.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내가 얼마나 너희를 가르치는 일에
수리산이 나는 좋더라 제가 살고 있는 군포는 크기 면에서 전국에서 가장 작은 시 중에 하나이지요. 이 도시로 14년 전에 이사와 지금까지 살아온 저에게 누군가 “군포는 뭐가 좋아요?”라고 묻는다면 지체 없이 이렇게 말할 거예요. “우리는 수리산이 제일 좋아요”라고요. 사실 어딜 가나 산 밖에 없는 강원도 산골에서 자란 저에게 처음부터 수리산이 그렇게 매력적인 것은 아니었죠. 하지만 도시 생활이 깊어질수록 수리산은 매력을 넘어 저에게 너무나 고마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물론 수리산 속에서 꾸준한 운동(달리기와 자전거)과 등산, 산책을 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도시 아주 가까이서 사람들을 이렇게 넉넉하게 안아주는 산은 드물지 않을까 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수리산이 왜 좋은지 이야기해야 하는데, 조금 색다른 면을 말해 보려 합니다. 바로 ‘수리산의 어둠’이지요. 새벽어둠_청각과 후각, 공간감의 놀라운 확장 새벽녘 날이 밝아오기 전, 수리산 바로 아래 자리 잡은 납덕골 계곡에 들어찬 어둠을 뚫고 달려보신 적이 있나요? 자전거로도 좋고요. 띄엄띄엄 놓인 가로등 불빛, 그마저도 없는 길을 달리다 보면 청각과 후각이 아주 예민해 집니다. 주변 풍경이 어둠에 지워진 공간속에
한옥 유진하우스에서 에스토니아인들과 금(金), 금치체험을! “Tere päevast! (테레 파바스트!)”,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던 인사말 “어서오세요! 유진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우리는 처음 만나면“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하는데, 한 번 해볼까요?”했더니, 모두들 서투른 발음으로 안녕하세요?를 제각각의 억양으로 말한다. 그래도 잘 했다고 칭찬을 해 드렸다. 그럼 “에스토니아어로는 어떻게 말하나요?” 물었더니, “Tere päevast! (테레 파바스트!)” 라고 한다. 아이구 이제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던 인사말이었다. 어슬프게 따라 했더니 다시 발음을 한 번 하신다. 그들의 귀에 거슬리는 발음이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다른 나라 사람들의 간단한 인사를 따라하는 것조차도 쉽지가 않다. 말을 배우는 것은 단순히 단어 몇 마디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배워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국에 관심을 가지고 여행을 온 분들이 한국 음식에 관심을 가져주다니 그저 감사할 뿐이다. “우린 김치 안 먹고 살아요”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음식인 김치가 코로나를 겪으면서 세계 사람들에게 더 인기가 많아졌다. 그런데 우리는 외국인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일본 학교 앞에는 왜 분식점이 없을까? 학창 시절 추억하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 새삼 생각해 보았습니다. 분식점과 도서관이 금방 떠오르더군요. 그런데 일본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좀 놀랐던 것은 학교 앞에 분식점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학교 내의 매점도 존재하지 않죠. 특히 학교에는 돈과 시계 등을 가지고 가면 안 됩니다. 즉 귀중품을 소지하지 못하고 개인 소지품 또한 가져가면 안 되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빈부 격차로 인해 아이들이 힘들어 할 수도 있는 정서를 고려한 것이라는 겁니다. 심지어 교과서도 교실에 절대 놓고 다니면 안 되었지요. 그래서 아이들은 총 11kg나 되는 가방(여행가방 사이즈)을 매일 들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 이유 또한 학교에 놓고 다니면 도난사고나 다른 아이들이 자기 물건에 낙서하고, 물건을 빼앗으며 놀리는 이지매 등을 방지하기 위해서랍니다. 이렇듯 돈을 가지고 다니지 못 하니 학교 근처에 분식점이 없는 것은 당연하고, 거리에서 손에 먹을 것을 들고 걸어 다니는 것 또한 허락되질 않았습니다. 위생상 좋지 않다는 것이죠. 일본의 학부모들은 이런 부분에 대해서 당연한 것처럼 생각해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초·중
남해안 문화·역사 기행 단상 ① 국립 부산 과학관 ② UN기념공원 ③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박물관 ④ 조선통신사역사관 ⑤ 국립해양박물관 ⑥ 자갈치시장 ⑦ 국제시장 ⑧ 차이나타운, 텍사스거리 ⑨ 을숙도 생태공원 5박 6일 남해안 여행! 저는 처음으로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2009년 네팔에서 온 후, 2017년 한국에 귀화해 한국인이 되었지만 한국 역사는 잘 몰랐어요. 이번 여행에서 이순신 장군이 우리나라를 지켰던 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역사와 관련된 영화를 봐도 아무것도 몰라서 그냥 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역사박물관, 옛날에 전쟁 했던 장소를 직접 가서 보고, 제 옆에서 5박6일 동안 같이 간 사람들이 계속 설명을 해주어 남해군 이순신 순국공원 안에 있는 이순신 영상관에서 노량해전 영상을 보며 처음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 조상님들이 우리나라를 살려주셔서 너무너무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더 노력을 해서 더 강한 나라를 만들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번 여행은 정말 좋았습니다. 군포시 금정동 김혜영 ‘코리아노사우루스 보성엔시스’오잉? 뭔 이런 촌스럽고 이상한 공룡이름이 다 있나? 전남 보
최강 약골, 드디어 달리기 시작하다 “아이쿠~ 발목아” 출근길 내려가는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서 또 오른쪽 발을 삐끗했다. 이번 발목 부상도 왠지 꽤 오래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저녁이 되니 발목이 퉁퉁 붓고 걸을 때마다 통증이 온다. 회사 근처 단골병원에 들러 X레이 사진을 찍고 진찰을 받았는데 선생님의 표정이 안 좋다. “이번에는 또 어쩌다가 다치셨어요? 자꾸 이렇게 다쳐서 어떡해요.” 발목에 인대가 또 늘어나 당분간 병원에 나와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발목 때문에 9개월 동안이나 도수치료를 받고, 치료를 받는 중간에도 괜찮아졌다가 다시 다치기를 반복하니 도수치료사 선생님도 이런 환자는 처음이라고 할 정도였다. 병원 직원들도 이제는 내가 병원 입구만 들어가도 알아서 접수를 해주었다. 발목 힘을 기르겠다고 산 마사이족 신발, 쿠션이 좋은 운동화, 발목을 잡아주는 운동화, 발목 보호대, 발 마사지기, 힘줄과 연골 강화에 좋은 건강식품 보조제, 염증 치료에 좋다는 강황가루 등 발에 쓴 돈만 해도 몇백만 원은 되었다. 거기다 9개월 동안 받은 도수치료와 병원비 약 값까지 1년간 쓴 돈을 합치면 몇 달치 월급은 훌쩍 넘었다. 원래 발에
[나선명의 만평팜 스토리 1] 평창에서 다시 시작된 귀농일기 9년 전, 전남 무안에서 양파농사를 야심차게 지어 본 것이 엊그제처럼 기억납니다. 좌충우돌하며 농사초보가 시작했다 계속 유지하기 어려워 3~4년간 손을 놓고 있었죠. 다른 일을 기웃거려 보기도 했지만, 농사에 대한 미련, 아쉬움이 남아 있었던지 충주와 서산 등 농장에서 일을 하며 농사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차에 일손을 돕기 위해 평창을 방문하게 되었고 작년 지인을 통해 평창에서 제2의 귀농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작물을 할까 고민하던 중에 고랭지 부추 재배 작목반이 막 형성되고 있었기에 마을 지인의 소개로 들어가 함께 배워가며, 공판장에 납품 하면 유통은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아 부추재배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모종을 공동으로 키워 옮겨 심을 때도 함께 도와주고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자라는 부추를 볼 때마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을 읊조리며 자세히 보고, 오래보려고 노력하니 예쁘고 사랑스럽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부추 모종을 막 심어 놓자 갑작스런 꽃샘추위가 와서 어린 모종에 살얼음이 오면 어찌해야하나 발을 동동거리며 해결책을 찾아보기도 했죠. 다행히 부추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