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for all” - “All for one” “10년 후에도 둘 다 싱글이면 결혼할까?” “글쎄?” 술자리에서 말한 농담 반섞인 대화가 현실이 되어 10년 후, 우린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외국상사에서 근무했던 저는 영어하고는 거리가 멀어 평소 관심을 갖고 있었던 일본에 유학하기로 결심했었죠. 부모님과 형제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91년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았습니다. 무섭고 두려움 같은 것은 별로 없는 성격이라 누구와도 거리낌 없이 사귈 수 있었어요. 일본 유학생활은 신났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지금의 남편도 만나게 되었죠. 저의 일본어 선생님! 그때는 정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서로 도와주는 관계였습니다. 그렇게 2년 동안의 유학이 끝나고 귀국 한 저는 대전 엑스포에서 근무했죠. 때마침 한국여행 온 남편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저 또한 일본으로 출장 가게 되면 연락해 이런저런 사람 사는 이야기도 주고받았죠. 서로 사이는 가까워졌지만 인연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쯤, 저에게 한국을 떠날 수 있는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IMF라는 금융위기와 더불어 친구 소개로 큰 마음먹고 시드니로 출발했지요. 그곳에서 일본과 한국여
주체적인 삶을 사는 내가 바로 리더! ▲ 사람과 사람을 잇는 곳 / 한사람 한사람의 마음을 연결하는 곳 / 따듯한 온기가 머무는 곳 / 온마음을 다해 고객의 고유함을 찾아주는 곳 워킹맘 초창기 헤쳐나가기 저에게는 20년 동안 다닌 첫 직장에서 결혼과 출산을 거쳐 꾸준히 회사를 다닌 ‘1호 워킹맘 나영주’라는 상징적인 타이틀이 회사 내에서 있었습니다. 저의 윗 선배들은 결혼 후 아이를 낳으면 그만 두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죠. 그래서 후배들에게 육아를 하면서도 워킹맘으로서 삶을 잘 사는 롤모델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자연스러운 책임감 속에 20년을 다녔습니다. 제가 입사할 때 100명 정도였던 직원은 20년 새 4천명이 넘었고, 매출액도 350억에서 2조가 넘는 회사로 성장했으니 회사를 다니는 동안은 일이 너무 많아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보직도 생산, R&D 등 재무회계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일을 다 해본 것 같아요. 그 중 마지막 12년은 HRD부서에 있었습니다. 가장 많은 직원들을 상대하고, 다양한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우리 회사를 이끌어갈 리더를 양성하는 것이 저의 역할이었습니다. 세월과 함께 흘러간 리더상의 변화 제가 과장 정도까지 가졌던 리더로서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아~ 법정 스님의 책이 여기 있었구나!’ 책 정리를 하다가 우연히 다시 집어 든 책 속에서 쪽지 하나가 떨어진다. 전화번호가 적혀있다. 17년 전 병실에서 만난 환자의 보호자 연락처다. 한 달 동안 2인실에서 지내며 속 얘기를 하던 일이 생각나 전화를 하려다가 ‘아차’싶어 다시 종이를 접었다. 혈액암을 앓고 있는 40대 동사무소 여직원은 그때 골수이식을 앞두고 있었다. 국내에는 적합한 골수가 없어서 해외에서 기증자를 찾았지만 말이 기증이지 4천만 원의 돈이 필요하다고 했다. 분당 아파트를 처분해서 병원비를 마련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날마다 환자의 언니가 와서 밤새며 간호를 했다. 그러면 난 왜 그 병실까지 갔는가? 인도에 다녀오고 급성간염으로 응급실로 향했다. ‘리시께시’에서 20루피를 주고 바나나와 오렌지를 샀다가 원숭이에게 습격을 받아, 약을 한 주먹씩 먹어서라고 혼자서 추정해 본다. 종이봉투에 과일을 담으라는 로운리 플레넷의 깨알 같은 조언을 깜빡 잊었다. 비닐봉지에 과일을 담아 덜렁덜렁 걷고 있을 때 원숭이 떼를 만났다. 그중 몸집이 좀 있어 보이는 원숭이가 과일 봉지를 낚아챘다. 봉지는 힘없이 뜯겨나가고 오렌지가 굴
[주수연의 인생 단상 19] 손에 넣고 싶다면, 눈에 보이게 하라 ‘벌써 한 해가 다 갔는데, 왜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 같지?’ 매일 새로운 사건, 사고가 터지는 일상에서 늘 해야 할 업무가 등 뒤에서 나를 밀고 있다고 느꼈던 예전에는 매 연말이 다가올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매 순간 일을 하고 있었음에도 늘 아무것도 이루어낸 게 없다고 느끼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죠. 특히 이 시기는 회사에서 각 개인의 성과를 평가하는 시기라 매우 중요한데, 연초의 기억은 까마득한 옛날 일이 되어버리곤 했습니다. 벌써 2021년도 이제 거의 다 흘러갔습니다. 여러 강의를 하면서 직장인들 사이에서 가장 핫한 주제는 역시 ‘시간관리’였던 것 같습니다.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단연코 ‘시간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나요?’였습니다. 이루고 싶은 꿈과 목표는 많은데, 항상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지고 바쁘게 일상에 쫓기듯 살아내는 우리의 고민은 거의 비슷한가 봅니다. 과연 우리는 시간을 관리할 수 있을까요? 24시간이라는 시간은 어느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이러한 시간은 가만히 두어도 흘러가고, 붙잡으려 해도 붙잡을 수 없지요. 매일 리셋되는 시간을 소중하게,
횟집사장에서 퍼스널모빌리티 기술자로 올해 2월부터 의왕에 있는 ‘한국퍼스널모빌리티 정비기술학원’에서 퍼스널모빌리티 정비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원래는 제가 운영하고 있는 회사에서 2017년부터 학원 교육을 준비 했으나, 여러 행정사항의 어려움때문에 몇몇 인력만 도제식으로 교육하는데 그쳤습니다. 규모를 키우는 것에는 역량이 부족했던 것이죠. 현재 강의를 하고 있는 학원도 비슷한 시기에 교육청에 등록해 2019년까지 진행했으나 2020년은 코로나로 인해 강의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2021년 초, 제가 합류하며 교육이 재게 되었고 올해 7월 노동부인증 NCS과정으로 등록되어 내일배움카드를 이용한 수강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퍼스널모빌리티는 개인운송수단이란 말로 우리가 접하는 전기자전거, 전동킥보드, 전동스쿠터 등 전기로 움직이는 모빌리티 중 개인이 이용하는 장치입니다. 최근 친환경 이동수단이 등장하며, 주요 이동수단은 대중교통 및 친환경 물류를 이용하고 이를 이용하기 전, 처음 사용하는 운송수단을 퍼스트마일, 나중에 사용하는 운송수단을 라스트마일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퍼스트마일은 원래 물류 업계에서 상품을 생산지에서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구간을 뜻하는 단어였으
칠레 화가 ‘리까르도’ 반응 르뽀 11월호에 실린 리까르도 기사, 칠레까지 가다 지난 11월 14일 일요일, 한국에서 도착한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11월호를 들고 화가 리까르도를 만났다. 14면에 8월 어느 날 내가 만난 화가 리까르도에 대해 쓴 글이 실렸고, 이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를 편집장님이 항공편으로 보내주어 일이 성사된 것이다. 이름하야 ‘리까르도의 반응 보기 르뽀’가 이루어진 것인데 나도 몹시 궁금했다. 부인 까르멘(Carmen)이 같이 있는 자리에서 신문을 보면 좋겠다 싶어 까르멘이 동석하길 기다리다가 리까르도에게 먼저 보여주기로 했다. 하필 까르멘이 샤워를 끝낸 후, 바로 부엌으로 들어가 점심식사를 준비하는 바람에 계획을 바꾼 것이다. 나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해서 신문에 대한 반응만 보고 가려고 했는데 까르멘이 교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앞치마 입고 성의를 보이는 바람에 차마 빨리 가야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를 본 그의 반응 먼저 1면 표지를 보더니 무슨 내용이냐고 물었다. 예상외의 질문이라 엉겁결에 신사임당 같은 내용이라고 말해주었다. 리까르도와 까르멘이 칠레 TV에서 드라마로 신사임당을 보았는데 무척 감명 깊었었다
[땅을 살려 작물을 거두는 뿌리애농장 이야기] 토양을 강하게 하는 미생물로 먹거리를 살리는 뿌 리 애 농 장 귀농으로 시작된 뿌 리 애 농 장 모든 작물의 기본은 뿌리! 저희는 이 뿌리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뿌리를 사랑하는 농법을 지향하는 마음으로 뿌리애농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뿌리애농장의 시작은 7년 전 창녕군에서 오래 농사지으신 시부모님의 농장에 저희 부부가 귀농하면서부터입니다. 귀농하며 가장 힘들었던 것은 초기 생활비를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초반에 내 사업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기까지 버티기 위한 자본과 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경제력이 있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청년 농부, 혹은 신규 농업인들은 자신의 자금을 농업 기반 마련하는 것에 투자하기 때문에 매달 들어가는 일정 생활비를 충당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희도 아이 둘과 함께 4인 가족 생활비를 감당하는 것이 처음에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지금은 청년 농부와 관련하여 지원 자금이 나오기도 하지만 7년 전에는 농업 분야에 생활을 유지해주는 지원 사업이 없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신규 농업인이 해결해야하는 부분이었죠. 또 농업이라는 것이 한 해 농사를 짓
[따뜻한 농업법인 농바름 스토리] 바른 먹거리, 바른 사람을 키우려는 농업법인 ‘농 바 름’ 강 행 원 대표 고향의 집과 땅을 지키러 다시 돌아오다 직장생활을 하던 중, 2004년경 빚으로 무안 고향집과 땅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위기에 처했습니다. 급하게 대출을 받아 집과 땅을 지킬 수 있었죠. 그렇게 마을에 돌아왔을 때는 마을 사람들을 도와주고 봉사를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마을 사업을 시작했었습니다. 마을이 경제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애도 많이 썼는데, 어느 순간부터 저를 시샘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생겼어요. 좋은 뜻으로 시작한 일에 대해 이런 저런 말을 들으며 마음고생을 하다, 마을 사업 일은 그만두고 지금은 2년 전부터 19명의 7가정과 함께 농업법인 ‘농 바 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우리 법인은 기존의 농사지은 분들이 아닌 모두 초짜 귀농하신 분들입니다. 기존에 이미 농사를 지었던 분들은 자기 생각들로 꽉 차 있어 새로운 것들을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처음 농사짓는 사람들은 배우면서 농사짓는 것도 힘들지만, 판매처가 없어 고민입니다. 그러니 각자 새로운 꿈을 꾸고 시작은 하지만 막상 시골에 정착하기가 매우 힘들지요. 우리 법인에서는 1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이 그리운 세상 유난히 고된 현장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매 주마다 있는 회사 전체 직원회의에 늦을 것 같아, 미리 양해를 구해 놓았지만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퇴근길 정체가 조금은 짜증스러운 저녁이었죠. 한참 삼거리 직진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앞에 서 있던 승용차가 조금씩 후진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급한 일이 있어 옆 차선을 타려고 준비하나 보다 하고 있는데, 이 차가 대체 멈출 기미가 없는 겁니다. 급하게 ‘빵~!’하고 크락션을 울렸지만, 조금의 지체함도 없이 ‘쿵~!’ 후진으로 제가 타고 있는 트럭의 정면을 그대로 박아 버렸습니다. 너무나 황당하고 어이없는 상황에, 온 힘을 다해 브레이크를 밟고 있던 저는 잠시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사고를 낸 앞차의 운전자는 나올 기미도 없이 조용했으니, 혹시 내가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있어 차가 밀린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들었습니다. 하지만 분명 나는 브레이크를 죽어라 밟고 있었고, 앞차의 잘못이 분명한데도 차 속에 여전히 앉아있는 운전자가 괘씸해 문을 열고 고함을 치며 나갔습니다. “도대체 운전을 어떻게 하는 거야!” 신호는 바뀌어
북한산 능선 트래킹이 준 선물 저는 본격적인 기억이 남아있는 유치원 시절부터 서울에서 쭉 살아온 서울깍쟁이입니다. 학창시절 부모님을 따라 이사를 여러번 다녔지만 거의 서울을 벗어나지 않았죠. 그렇게 서울근교에서 30~40년을 살아온 동안, 서울의 서남쪽에 살았던 터라 북한산은 근처에도 가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제게 올 가을 두 번의 북한산 산행은 정말 이때까지 전혀 몰랐던 서울의 매력을 알게 해 준 선물이었습니다. 지난 9월 18일. 바로 전날까지 가을태풍 소식이 있어서 과연 등산을 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그 태풍의 바람덕에 그날의 날씨는 최고좋은 공기 속, 환상적인 하늘아래 북한산 비봉능선을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비봉능선~문수봉의 코스는 초보 등린이도 갈 수 있는 추천 Best코스라고 되어 있었기에 ‘자주 가던 수리산자락 올라가듯 가면 되겠군’하며 첫번째 봉우리인 족두리봉으로 발걸음을 옮겼죠. 하지만! 북한산은 ‘국립공원’이라 차원이 다른 것일까요? 초반부터 커다란 바위를 타고 올라가는 길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난코스였습니다. 등산화 대신 신고 간 운동화바닥이 그나마 미끄럽지 않았으니 다행이었지 하마터면 꼭두새벽부터 부지런을 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