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철의 한국사칼럼 26] 삭제 될 뻔한 ‘홍익인간’을 위한 변명 우리의 교육이념은 ‘홍익인간’입니다. 널리 ‘인간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뜻이죠. 간혹 인간세상이 인간으로 잘못 번역되기도 합니다. ‘홍익인’은 홍익하는 대상이 ‘사람’에 한정적이라면 ‘홍익인간’은 ‘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을 포함한 포괄적 의미입니다. 최근 국회에서 교육이념 홍익인간을 삭제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반대에 부딪쳐 법안을 접었지만 언제 또 제기될지 모르죠. 그런데 홍익인간 삭제 시도에 대해 역사학계를 포함하여 반대 목소리가 높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교육이념은 보편적 의미를 담아야 하는데 고조선의 단군신화는 불교적 색채가 강하다는 것이죠. 단군신화에 나오는 홍익인간도 불교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보편적 교육이념에 적합하지 않다는 인식이 밑에 깔려있습니다. 그런데 홍익인간 자체만 본다면 불교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불경에 홍익인간이란 단어 조합은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홍익중생’ 또는 ‘이익인간’이란 용례는 보입니다. 유교의 대표 경전인《논어》에는 ‘홍인(弘人)’, ‘홍도(弘道)’가 보이며 실학자 정제두의 글 속에‘홍익’이란 글귀도 있습니다. 홍익인간을 불교적 윤색
[조경철의 한국사칼럼 27] 무령왕릉 진묘수, “너를 천년동안 지켜줄게” 백제는 흔히 ‘잃어버린 왕국’이라고 합니다. 잃어버린 게 많아서인지, 잊은 게 많아서인지, 빼앗긴 게 많아서인지 모르겠지만, 700년 역사에서 남아있는 것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아마 일제강점기 상당 부분 도굴 또는 도굴에 가까운 발굴로 상처를 입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령왕릉은 구사일생으로 도굴되지 않았습니다. 1971년 발굴됐으니 올해로 벌써 발굴 50주년이네요. 무령왕릉이 도굴되지 않은 건 일종의 행운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발굴(도굴)자의 착각 덕분이었지요. 가루베 지온(1897~1970)은 송산리 고분들을 발굴하면서 무령왕릉을 능이 아닌 언덕으로 생각했습니다. 1971년 여름 어느 날, 긴 장마에 대비하여 송산리 고분의 배수로를 만들던 중 땅을 파던 삽 끝에 무언가 걸렸습니다. 아래를 파보니 그곳에는 한 번도 손대지 않은 원형 그대로의 무령왕릉이 있었습니다. 무령왕릉 안에는 능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지석(땅속에 묻는 비석)을 비롯해 수없이 많은 유물이 들어있었습니다. 무령왕릉의 입구는 벽돌로 막혀있었는데, 벽돌을 허물자 안개인 듯, 수증기인 듯한 기운이 뿜
[조경철의 한국사칼럼 29]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조선시대 왕들 가운데 ‘군’이 들어간 세 왕이 있었다. 노산군, 연산군, 광해군이다. 노산군은 숙종 때 단종으로 복권되었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여전히 군으로 남아있다.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쫓겨났고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쫓겨났다. 반정(反正)은 ‘바르게 돌려놓다’는 뜻이다. 연산군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있던 박원종은 신수근을 찾아갔다. 박원종은 신수근과 장기를 두는 데 장기 알의 ‘궁(宮)’을 서로 바꿔 놓았다. 신수근에게 반정에 참여해 달라는 표시였다.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다. 연산군의 부인 신씨는 신수근의 여동생이었다. 장차 연산군이 폐위되면 신씨도 폐비가 되고 신수근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반정에 참여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박원종은 왜 반정과 같은 일급비밀을 연산군의 처남이자 신씨의 오빠인 신수근에게 알려주고 같이 참여하자고 했을까. 실은 신수근은 박원종이 장차 왕으로 추대할 진성대군의 장인이기도 했다. 신수근의 딸 신씨는 반정이 성공하면 나중에 진성대군(중종)의 부인 곧 왕비가 될 상황이었다. 그래서 박원종은 왕의 장인이 될 신수근에게 반정을 알리고 자기편에 서달라고 한 것이다. 신수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