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초 돌솥밥을 만든 42년, 반야 돌솥밥 임복주 명인을 만나다 바람 든 무도 맛있게 조려내는 친정어머니 손맛 어릴 때부터 음식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았어요. 우리 초등학교 시절에는 먹을 게 귀했잖아요. 요새는 설탕이지만 그때는 사카린 넣은 단물로 밀가루를 반죽해 세모 네모 모양을 만들어 검정 솥에 쫘악 깔고 불에 구우면 아주 맛있었어요. 요새로 말하면 비스켓인데, 이걸 만들어 먹다가 혼나기도 많이 했죠. 맛의 고장 전라도 전주에서 태어나 무엇보다 친정어머니의 음식 솜씨가 아주 좋았어요. 어머니는 바람 든 무 하나라도 맛있게 조려낼 줄 아는 손맛을 가진 분이셨죠. 종종거리며 잔심부름을 하면서 반찬마다 뭐가 들어가야 잡내가 사라지고, 또 뭘 넣지 않아야 풍미가 사는지 자연스레 익히게 되었죠. 이건 글로 배워서 되는 게 아니에요. 평생 삼시 세끼 내 손으로 담아내야 터득되는 것이죠. 친정엄마의 ‘양은냄비 밥’이 아이디어 24살에 결혼한 저는 시댁이 경제적으로 어려워 내가 나서서 집안을 일으켜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래서 음식 장사를 하기로 결정하고 식당을 차렸죠. 어떤 메뉴를 할까 고민하다, 지금 내가 제일 먹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봤어요. 그때
13번 공정으로 꽃 피운 얼음 꽃, 빙사과(氷沙菓) 장인 ‘홍성란’을 만나다 제2의 고향, 강원도 영월 저희 집안은 대대로 경기도 안성에서 정미소와 방앗간을 했습니다. 아버님은 집안의 장남으로 인물이 훤하시고 마음도 좋아 사람들이 잘 따랐어요. 그러다보니 유혹도 많아, 그 많던 재산을 다 탕진하고 결국 강원도 영월로 가셔야 했죠. 영월엔 작은아버지와 고모가 사셨는데, 아버지는 거기서 다시 방앗간을 시작하셨습니다. 제 기억에 의외로 음식솜씨가 좋으셨던 아버지와 음식솜씨가 남달랐던 고모 덕에 그곳에선 항상 먹을 것이 풍부했어요. 강원도 영월은 저에게 제2의 고향이랍니다. 우리 고모는 동네 ‘과방장’ ‘과방’이라고 들어 보셨나요? 한마디로 ‘과자방’이죠. 음식 솜씨가 좋으셨던 고모는 특히, 정교한 음식을 잘 만드셨어요. 예전에 동네에서 잔치를 하면 한달 전부터 준비를 위해 광이나 방을 정해 ‘과방’을 차립니다. 항상 고모가 ‘과방장’이 되셨죠. 차려진 과방에는 아무나 못 들어가는데 저는 어리기도 했지만 그냥 통과 했어요. 이곳에서 여러 음식도 많이 보고, 약과와 과즐(과줄의 옛말로 순 우리말, 꿀과 기름을 섞은 밀가루 반죽을 판에 박아 모양을 낸 후 기름에 지진
우리 모두의 인생 밥집, ‘강민주의 들밥’ 헉--;;; 내가 이리 칼을 잘 다루다니! 고등학교 가정 실습시간이었어요. 선생님이 달걀지단을 가르쳐 주셨는데, 제가 선생님보다 칼질을 더 잘하는 겁니다. 무채, 당근 채를 신들린 듯 빠르고 고르게 썰어내는데, 저 자신도 놀랄 정도였어요. ‘내가 이리 칼을 잘 다루다니!’ 저희 집안엔 특별히 요리 잘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말이죠. 요리에 관심이 많았던 저는 주말이 되면 도너츠, 빵, 고로케 등을 만들어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어 인기를 얻기도 했지요. 그리고 20대 아가씨 시절에는 안동에서 서울로 올라와 오빠, 남동생과 자취를 하면서 식사를 담당해야 했는데, 서점에 가도 패션 잡지보다 요리책에 손이 갔죠. 이상한 것은 음식 하는 게 싫거나 힘들거나 짜증나지 않고 재밌더라고요. 얼떨결에 시작한 식당? 경기도 이천에서 살게 되면서 사찰에 들어가 잠시 음식을 배울 기회가 있었어요. 음식 하나하나를 정성껏 배우니 아주 재밌더라고요. 저의 음식 솜씨를 보고 스님이 식당 이름, 메뉴 등 가게의 컨셉을 정해주셨죠. 그러면서 얼떨결에 바로 이 자리에서 2000년도에 식당을 시작했습니다. 음식점을 한다는 것은 저와 거리가 먼 세상인 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