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칠 때 떠나는 용기 테니스에서 한 해 동안 세계 메이저 대회에서 모두 우승하는 것을 ‘캘린더 그랜드슬램’이라고 한다. 세계랭킹 1위인 노박 조코비치는 지난 9월에 열린 US오픈 한 번만 이기면 ‘캘린더 그랜드슬램’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대의 패기로 똘똘 뭉친 랭킹 2위 매드베데프와의 경기는 쉽지 않았다. 메드베데프의 강력한 서브와 스트로크에 밀려 두 세트를 내리 지고 끌려가고 있었다. 조코비치는 세 번째 세트도 5대 2까지 벌어졌다. 이후 가까스로 두 게임을 연거푸 이겨 5대 4까지 쫓아가고 있었다. 팬들의 열화같은 환호를 들으며 벤치에 앉아 잠시 휴식을 갖던 조코비치는 땀을 닦던 수건으로 얼굴을 감싼 채 엉엉 울었다. 왜 울지? 역전할 수도 있는 순간인데, 이길 수도 있는데… 사람들은 힘없이 무너지는 황제를 지켜보는 것이 안타까운 듯 했다. 결국 조코비치는 세 번째 세트를 내주고 ‘캘린더 그랜드슬램’ 달성에 실패했다. 나는 그날 경기의 결과보다 더 강렬하게 남아있던 조코비치의 눈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조코비치가 수건에 얼굴을 파묻고 통곡하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조코비치의 눈물은 어떤 의미였을까? 조코비치는 그 순간이 바로 자신
								박준범의 종횡무진 고고(古考)한 이야기(1) ▲ 육조거리-1914년 경성부명세신지도 서울 광화문광장 조성거리 터파기 공사, 내 눈에 조선이 들어오다 서울은 구석기시대부터 현재까지 시간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역사의 시간과 공간을 담은 도시이다. 흔히 서울의 역사를 말할 때 한성백제부터 생각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이 도시에 사람들이 처음 살았던 연유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찾아 다녔던 유적 얘기를 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먼저 시대를 아주 내려와서 조선의 한양 육조거리 발굴 얘기부터 하겠다. 최근 서울시가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을 위해 2019년 1월부터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2021년 5월에 완료한 세종문화회관과 정부종합청사 주변의 터에서 조선시대 육조를 비롯한 주요 관청터(삼군부, 중추부,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와 관련시설 등이 발굴조사를 통해 새로이 확인되었다. 이는 문헌의 기록을 고고학이 증명한 아주 중요한 사례로 서울 고고학 연구의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조사를 토대로 조선시대 육조거리 시간의 변화상을 쌓인 지층을 통해 살필 수 있었고, 이 토층을 기준으로 주변 유적을 조사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참고로 광화문광장 조성사업은
								칠레 화가 ‘리까르도’ 반응 르뽀 11월호에 실린 리까르도 기사, 칠레까지 가다 지난 11월 14일 일요일, 한국에서 도착한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 11월호를 들고 화가 리까르도를 만났다. 14면에 8월 어느 날 내가 만난 화가 리까르도에 대해 쓴 글이 실렸고, 이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를 편집장님이 항공편으로 보내주어 일이 성사된 것이다. 이름하야 ‘리까르도의 반응 보기 르뽀’가 이루어진 것인데 나도 몹시 궁금했다. 부인 까르멘(Carmen)이 같이 있는 자리에서 신문을 보면 좋겠다 싶어 까르멘이 동석하길 기다리다가 리까르도에게 먼저 보여주기로 했다. 하필 까르멘이 샤워를 끝낸 후, 바로 부엌으로 들어가 점심식사를 준비하는 바람에 계획을 바꾼 것이다. 나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해서 신문에 대한 반응만 보고 가려고 했는데 까르멘이 교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앞치마 입고 성의를 보이는 바람에 차마 빨리 가야한다고 말하지 못했다.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를 본 그의 반응 먼저 1면 표지를 보더니 무슨 내용이냐고 물었다. 예상외의 질문이라 엉겁결에 신사임당 같은 내용이라고 말해주었다. 리까르도와 까르멘이 칠레 TV에서 드라마로 신사임당을 보았는데 무척 감명 깊었었다
								거친 질감 속에 새긴 깊은 삶의 이야기 - 박수근 전시회를 다녀와서 ▲ 1962년, 하드보드에 유채 59.3x121cm 농악 덕수궁 국립현대 미술관에서 열리는 ‘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 전시회를 관람하기 위해 토요일 아침 일찍, 서울 나들이를 떠났습니다. 미술관이 위치한 덕수궁 안에는 얼마전까지 세상을 온통 황홀하게 물들였던 단풍의 끝자락이 남아있어, 고즈넉한 고궁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었습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는지 사람들은 많지 않았지만, 하나같이 행복한 얼굴로 늦가을 고궁의 정취를 즐기고 있었죠. 미술관이 열리기 전까지 고궁을 돌아보며, 때마침 전각과 정원에서 무료로 열리는 ‘덕수궁 프로젝트 2021: 상상의 정원’의 전시도 둘러보았습니다. 개관시간이 임박하여 고궁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고 싶은 욕망을 뒤로하고 멋진 나무들과 작별인사를 한 뒤, 미술관으로 달려갔습니다. 궁전 서쪽에 우뚝 솟은 지극히 서양적인 석조건물의 미술관은 이질적이면서도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죠. 사전예약으로 빠르게 입장한 미술관 안은 제법 많은 관람객으로 북적이고 있었습니다. 작품들은 1, 2층에 각각 총 4개의 섹션으로 나누어 전시되어 있었는데, ‘밀레를 사랑한 소년’,
								[한현석의 야생초 이야기 1] 용담(Gentiana scabra Var.)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독자 여러분!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충북 청주시에서 ‘태극화훼농원’을 운영하고 계시는 한현석 대표님이 독자분들을 위해 야생초에 대한 이야기를 매월 기고해주시기로 했습니다. 올해 12월호 보라색 꽃인 관상용 야생화 ‘용담’스토리를 시작으로 내년에 더 풍성한 이야기를 담아주실 것을 기대해 봅니다. 용담은 전국의 산야에서 볼 수 있는 여러해살이풀입니다. 초장은 20~70cm로 개체마다 차이가 크며 줄기 상단에 보라색 꽃이 피어납니다. 개화 기간이 긴 편이라 관상용으로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야생화이죠. 이 꽃은 늦은 가을까지 우리의 들녘을 장식하는 아름다운 꽃으로 늦여름에 피기 시작하여 11월까지도 볼 수 있답니다. 용담(龍膽)은 ‘용의 쓸개’라는 의미입니다. 용담은 오래 전부터 뿌리를 말려 약재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 약효에 관련한 일화가 많고 그 맛이 매우 쓴 것이 특징이죠. 얼마나 쓰면 이름을 용담이라 했을까요? 시험 삼아 뿌리를 조금 잘라서 입에 넣어보면 쓴맛 때문에 눈앞에 용이 왔다 갔다 할지도 모릅니다. 용담은 도시에서는 보기 어렵지만 한적한 시외에서 볼 수
								[땅을 살려 작물을 거두는 뿌리애농장 이야기] 토양을 강하게 하는 미생물로 먹거리를 살리는 뿌 리 애 농 장 귀농으로 시작된 뿌 리 애 농 장 모든 작물의 기본은 뿌리! 저희는 이 뿌리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뿌리를 사랑하는 농법을 지향하는 마음으로 뿌리애농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뿌리애농장의 시작은 7년 전 창녕군에서 오래 농사지으신 시부모님의 농장에 저희 부부가 귀농하면서부터입니다. 귀농하며 가장 힘들었던 것은 초기 생활비를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초반에 내 사업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기까지 버티기 위한 자본과 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경제력이 있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청년 농부, 혹은 신규 농업인들은 자신의 자금을 농업 기반 마련하는 것에 투자하기 때문에 매달 들어가는 일정 생활비를 충당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희도 아이 둘과 함께 4인 가족 생활비를 감당하는 것이 처음에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지금은 청년 농부와 관련하여 지원 자금이 나오기도 하지만 7년 전에는 농업 분야에 생활을 유지해주는 지원 사업이 없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신규 농업인이 해결해야하는 부분이었죠. 또 농업이라는 것이 한 해 농사를 짓
								[따뜻한 농업법인 농바름 스토리] 바른 먹거리, 바른 사람을 키우려는 농업법인 ‘농 바 름’ 강 행 원 대표 고향의 집과 땅을 지키러 다시 돌아오다 직장생활을 하던 중, 2004년경 빚으로 무안 고향집과 땅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갈 위기에 처했습니다. 급하게 대출을 받아 집과 땅을 지킬 수 있었죠. 그렇게 마을에 돌아왔을 때는 마을 사람들을 도와주고 봉사를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마을 사업을 시작했었습니다. 마을이 경제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애도 많이 썼는데, 어느 순간부터 저를 시샘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생겼어요. 좋은 뜻으로 시작한 일에 대해 이런 저런 말을 들으며 마음고생을 하다, 마을 사업 일은 그만두고 지금은 2년 전부터 19명의 7가정과 함께 농업법인 ‘농 바 름’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우리 법인은 기존의 농사지은 분들이 아닌 모두 초짜 귀농하신 분들입니다. 기존에 이미 농사를 지었던 분들은 자기 생각들로 꽉 차 있어 새로운 것들을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처음 농사짓는 사람들은 배우면서 농사짓는 것도 힘들지만, 판매처가 없어 고민입니다. 그러니 각자 새로운 꿈을 꾸고 시작은 하지만 막상 시골에 정착하기가 매우 힘들지요. 우리 법인에서는 1
								[일본 교토국제고 야구부 집중 탐방기] 꼭! 일본고교 야구 정상에 서리라! 지난 6월호 <행복한동네문화이야기>에 ‘교토 국제고’에 대해 소개 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호에는 전국고시엔 대회 4강, 교토전체지역에서 1등을 한 교토 국제고 야구부에 대해 교장선생님, 감독님, 야구부 주장을 집중 인터뷰 해보았습니다. 전국 여름 고시엔 대회 4강, 교토전체 지역에서 1등을 했는데 감독님을 비롯해, 각각 야구부원들의 소감이 남다를 것 같습니다. 먼저 감독님은 현재 성적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뭐라 생각하나요? 선수 모두가 ‘일본 정상에 서겠다’라는 정신력이 지금의 성적을 만들어낸 것 같습니다. 최초로 출전했던 봄 고시엔 대회 2차전에서 진 경험이 아이들을 자극했던 것 같아요. 첫 출전에 있어 부담감도 있었을 텐데 아쉽게 패배하자 학생들 한명 한명이 이번 여름 고시엔에서는 꼭 승리하리라는 다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말로만이 아닌 실제 결과로 나왔습니다. 훈련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해온 반복훈련, 전략과 전술로 진행했고, 다른 것이 하나 있다면 바로 ‘정신무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야구부원을 대표해 이러한 승리에 대해 야구부 주장은 어떤가요? 첫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이 그리운 세상 유난히 고된 현장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매 주마다 있는 회사 전체 직원회의에 늦을 것 같아, 미리 양해를 구해 놓았지만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퇴근길 정체가 조금은 짜증스러운 저녁이었죠. 한참 삼거리 직진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앞에 서 있던 승용차가 조금씩 후진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급한 일이 있어 옆 차선을 타려고 준비하나 보다 하고 있는데, 이 차가 대체 멈출 기미가 없는 겁니다. 급하게 ‘빵~!’하고 크락션을 울렸지만, 조금의 지체함도 없이 ‘쿵~!’ 후진으로 제가 타고 있는 트럭의 정면을 그대로 박아 버렸습니다. 너무나 황당하고 어이없는 상황에, 온 힘을 다해 브레이크를 밟고 있던 저는 잠시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사고를 낸 앞차의 운전자는 나올 기미도 없이 조용했으니, 혹시 내가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있어 차가 밀린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들었습니다. 하지만 분명 나는 브레이크를 죽어라 밟고 있었고, 앞차의 잘못이 분명한데도 차 속에 여전히 앉아있는 운전자가 괘씸해 문을 열고 고함을 치며 나갔습니다. “도대체 운전을 어떻게 하는 거야!” 신호는 바뀌어
								[조경철의 한국사칼럼 27] 무령왕릉 진묘수, “너를 천년동안 지켜줄게” 백제는 흔히 ‘잃어버린 왕국’이라고 합니다. 잃어버린 게 많아서인지, 잊은 게 많아서인지, 빼앗긴 게 많아서인지 모르겠지만, 700년 역사에서 남아있는 것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아마 일제강점기 상당 부분 도굴 또는 도굴에 가까운 발굴로 상처를 입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령왕릉은 구사일생으로 도굴되지 않았습니다. 1971년 발굴됐으니 올해로 벌써 발굴 50주년이네요. 무령왕릉이 도굴되지 않은 건 일종의 행운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발굴(도굴)자의 착각 덕분이었지요. 가루베 지온(1897~1970)은 송산리 고분들을 발굴하면서 무령왕릉을 능이 아닌 언덕으로 생각했습니다. 1971년 여름 어느 날, 긴 장마에 대비하여 송산리 고분의 배수로를 만들던 중 땅을 파던 삽 끝에 무언가 걸렸습니다. 아래를 파보니 그곳에는 한 번도 손대지 않은 원형 그대로의 무령왕릉이 있었습니다. 무령왕릉 안에는 능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지석(땅속에 묻는 비석)을 비롯해 수없이 많은 유물이 들어있었습니다. 무령왕릉의 입구는 벽돌로 막혀있었는데, 벽돌을 허물자 안개인 듯, 수증기인 듯한 기운이 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