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철의 한국사칼럼 32] 나라이름 ‘고려’와 영문표기 나라 이름 ‘고려’는 태조 왕건이 세운 나라의 이름이다. 우리나라의 Korea란 영문국호도 여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런데 고려란 나라 이름은 태조 왕건이 맨 처음 사용한 나라 이름이 아니다. 후삼국의 궁예가 먼저 사용한 나라 이름이다. 궁예는 처음 고려란 나라 이름으로 시작해서 이후 마진, 태봉으로 나라 이름을 바꾸었다. 그런데 궁예의 고려도 궁예가 처음 사용한 나라 이름이 아니었다. 고구려가 4~5세기 평양천도를 전후하여 나라 이름을 고구려에서 고려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국호변경까지는 아니지만 4~5세기 고구려는 고려란 나라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후 고려란 나라 이름을 주로 사용했다. 정리하면 고구려가 고려로 나라 이름을 바꾼 이후 궁예와 왕건 모두 ‘고려’란 나라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 또 Korea란 영문 국호의 유래도 왕건의 고려가 아닌 고구려의 고려까지 앞당길 수 있다. 현 한국사 교과서는 주몽, 궁예, 왕건이 세운 나라 이름을 고구려, 후고구려, 고려라 하고 있다. 일반 한국사 개설서도 마찬가지다. 현 고구려-후고구려- 고려로 이어지는 계승관계를 통해서는 고구려가 ‘고려’로
								[친환경 목장 농도팜 스토리] 자연이 함께 어우러진 가장 아름다운 목장으로 선정된 친환경 목장 ‘농 도 원’ ‘농 도 원’의 역사 농 도 원은 원래 ‘복음농도원’이라는 이름으로 1952년 6.25 전쟁 중에 설립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농장 중 하나입니다. 한때 농장내의 ‘복음농도원’이라는 농업학교를 통해 수많은 농촌지도자와 ‘가나안농군학교’를 탄생시킨 한국 농촌운동의 산실이기도 하죠. 농도원 출신인 ‘유태영’ 박사는 1960년대 새마을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세우고, 그 당시 우리나라가 너무 헐벗고 가난했기에 식량의 자주권을 우리 스스로 가져야겠다는 뜻을 정하고, 시골의 젊은 영농후계자를 육성하려 하셨죠. 한편 저희 아버님은 농장이 경제성장력 있는 산업화된 시설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어요. 농도원은 1973년부터 홀스타인 젖소를 기르고 우유를 생산하는 정통 낙농목장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제가 1990년 물려받아 ‘농도원’으로 이어가고 있지요. 화이트 칼라에서 목장 주인으로 처음 아버님께서 “이 일을 해봐라” 했을 때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어요. 서울에서 공학을 공부하고 회사에 다니며 삽질 한 번 떠보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아버님은 동물과 자연을
								[손미정의 문화·예술 뒷이야기 3] 완벽주의자들의 원만한 인간관계를 위하여 세계적인 교향악단들의 내한 공연을 보거나 유명 음악가들의 평전을 보면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에 있어서 ‘완벽’을 추구했던 음악가들이 많았다. 20세기 거장들의 음악 이야기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지휘자 ‘카라얀’인데, 그의 화려했던 예술 인생과 대비되는 또 하나의 인물은 ‘세르지우 첼리비다케’(Sergiu Cellibidache)이다. 첼리비다케는 카라얀과 같은 시대, 같은 나라에서 활동하면서도 그와는 달리 철저히 상업성을 거부했던 음악가였다. 카라얀은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와 상업화에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로 부와 명예를 함께 움켜쥔 화려한 음악 인생을 누린 반면 첼리비다케는 ‘지휘계의 기인 ’혹은‘이단자’로 불렸다. 토스카니니처럼 암보로 지휘하는 것은 기본이고 광적인 카리스마로 오케스트라를 휘어잡았다. 수십 번의 리허설을 통한 혹독한 연습으로 완벽을 추구했고 어떠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다. 독설가로 유명한 첼리비다케는 다른 지휘자들을 거침없이 비판했다고 한다. 카라얀에 대해서 는‘젊은 음악가에게 심각한 독이 될 수 있는 본보기’라고 했고, 로린 마젤에 대해서는 ‘칸트를 읽는
								“새~들에게 물어봐!” 우주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비록 오랜 시간 인류가 5대양 6대주의 정복자로 명성을 쌓아왔다 할지라도, 그것은 ‘2차원적 평면운동’(대상: 땅과 바다)에 불과합니다. 지난 500년 동안 서양은 땅을 중심으로 한 ‘대륙문화’를 떠나, 더 광활하고 위험한 대양을 터전 삼아 ‘해양문화’를 이뤄갔지만, ‘2차원’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인간이 비행기를 만들어 익숙한 평면을 떠나 ‘3차원의 입체운동’(대상: 하늘)을 시작한 건 100여 년이 채 안 되는 20세기입니다. 이제 인류는 이런 짧은 ‘항공문화’의 시간을 뒤로하고, 완전히 새로운 ‘4차원적 우주운동’(대상: 우주)의 ‘우주문화’를 이루어야 할 시점에 놓였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지구의 중력을 완전히 벗어나, 무중력과 다양한 중력들을 가진 우주에서 이룰 삶의 예비단계로서의 ‘3차원적 삶의 방식’을 충분히 경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이런 가운데 우주는 아니지만, 오랜 시간 하늘을 나는 것이 일상인 삶을 살아온 새들이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는 것은 3차원적 삶이라도 제대로 배워야 할 우리에게 있어 놀라운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우주를 향했던 눈을 조금 낮추
								이순신의 통영, 통영의 이순신 김한민 감독의 영화 <한산 : 용의 출현>이 한여름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을 때, 한산대첩의 현장인 통영에 다녀왔다. 통영이 초행은 아니었지만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 난 직후였기에 감흥이 새로웠다. 통영은 이순신의 고장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통영(統營)은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의 줄임말이다. 삼도수군통제영은 한산대첩 이듬해인 1593년 신설됐다. 충청과 전라, 경상도의 수군을 총괄할 각 수영(水營)의 상급 지휘부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산대첩 당시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사로서 이억기의 전라우수영과 원균의 경상우수영 수군들을 아울러 지휘했다. 이순신 장군은 연합함대의 사령관격이었지만 이억기와 원균은 장군의 부하가 아닌 수평관계의 장수였다. 지휘체계의 결함이 불가피했다. 통제영은 이를 극복하기 위한 기관으로 1895년까지 존속했던 조선 수군의 총본부였다. 통제사는 종2품 관직으로 팔도의 도백(道伯)인 관찰사(觀察使)와 동급이었다. 외직으로는 최고위급이다. 역대 통제사는 모두 208명이었다. 초대 통제사는 한산대첩의 주역, 이순신 장군이 임명됐다. 통제사는 한산도에 통제영을 설치했다. 통제영이 지금의 자
								엄마, 병아리를 키우면 안 될까요? 유진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서 손에 노랑 병아리 한 마리를 들고 왔다. 우리도 어릴 적에 학교 앞에서 노랑 병아리를 보곤 했는데, 아직도 그런 일이 있나 싶어 의아해 하면서 “병아리는 왜 데리고 왔어?”라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학교 앞에서 샀던 병아리를 키워 닭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작은 두 손으로 병아리를 조심스레 싸안고 온 유진이를 보자마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병아리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느껴지는 무심한 말투와 목소리 톤이 좀 높아진 소리에 유진이가 더 놀라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사실은 작은 병아리라고 해서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희미하게 꺼져가는 촛불과 같은 생명이라고 여겨져서 애잔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조심스레 병아리를 살피면서 생사부터 확인을 해야 했다. “병아리가 살아 있기는 살아 있어?” “네, 살아 있어요. 삐약 삐약 소리를 내기도 해요.”라면서 병아리를 데리고 온 사연을 들려주었다. 친구인 지수가 학교 앞에서 병아리를 샀다고 했다. 한 마리만 사려고 했는데, 한 마리 값으로 두 마리를 주었다고
								[다문화, 너와 나의 이웃이야기 4] 다문화가정 대학 진학률, 40.5% 한국 학생 진학률 71.5%에 비해 현저히 낮아 지난 6월 말 여성가족부는 ‘2021년 전국다문화가족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전국 1만5천여 다문화 가구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다문화가정 자녀의 대학 진학률은 40.5%로 한국 학생의 진학률인 71.5%에 비해 현저히 낮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만 15세 이상 다문화가정 자녀의 비재학, 비취업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니트(NEET, Not in Education, Employment, and Training - 학업도 하지 않고 일도 하지 않으며 취업을 위한 훈련도 받지 않는 젊은이를 지칭) 상태의 비율은 14%로 집계되었죠. 여가부는 다문화가정 자녀의 낮은 진학률의 원인으로 부모의 낮은 사회경제적 지위, 입시 정보의 부족, 한국 학생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사교육 수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교육에 있어 부모의 관심과 역할, 지원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결혼이민자의 경우, 세월이 지나 자녀가 초등학생, 중학생이 되어도 여전히 한국어가 미숙하고 한국 사회의 시스템을 어려워하
								[다문화, 너와 나의 이웃이야기 2] 다문화사회전문가가 되려면 다년간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각종 지원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저출산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인구유출과 인구절벽의 현안에 고민하는 지자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저출산, 고령화로 앞당겨진 다문화사회와 노인사회에 대한 국가적 대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고 이제는 개인도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적극적으로 대비해야 할 때가 되었죠. 이에 대한 대안은 몇 개나 될까요? ‘외국인정책은 인구정책이다’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출산율의 증가입니다. 산아제한정책에 익숙했던 우리는 곧장 출산장려정책으로 돌아섰고, 지금도 10년 간 150조 원을 쏟아 붓지만 결과는 더한 감소세이죠. 이에 이민자를 받아들여 생산인구를 늘이고, 경제를 활성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외국인정책은 인구정책이다’입이다. 이렇게 도입하기 시작한 국내 체류 외국인 비율은 2016년 전체 인구 대비 3.96%에서 2019년 4.87%(252만 명)로 매년 증가하다가 코로나로 인해 국경이 봉쇄되어 2년간 입출국이 제한되다 보니 2020년에는 3.93%(196만 명)로 하락세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는 일시적 현상으로 일상이 회
								자연과 민속음악에서 음의 자유로움을 발견하다 20세기 현대 음악의 선구자 ‘벨라 바르톡’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서울 나들이. 오랜만에 찾은 마로니에 공원은 그간 코로나로 막혀있던 공연들이 하나둘 다시 시작되면서 제법 활기차 보였습니다. 음악회가 있는 ‘예술가의 집’바로 앞 야외무대에서도 한 연주자가 열정적으로 색소폰 연주를 하고 있었지요. 오늘은 모처럼의 서울 나들이 음악회 속에서 처음 만난, 생소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친근한 헝가리의 작곡가 벨라 바르톡 (Bela Bartok, 1881~1945)을 소개해 볼까합니다. 첫인상_현대화된 오래됨의 독특한 매력 먼저 여러분이 궁금하지 않도록 바르톡을 중심으로 공연의 소감을 짧게라도 이야기 하고 넘어가야겠죠? 이번 공연된 바르톡의 작품들은 피아노 반주에 맞춰 부르는 헝거리 전통 민요들이었는데, 해학적이고 솔직한 가사의 성악파트는 분명 민요의 그것인데, 함께 연주된 피아노의 음들은 노래와 상관없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현대음악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어색하고 괴기스럽기까지 해 보이는 조합임에도 가사가 표현하는 곡의 느낌이 충분히 전달 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아름다움과 자유로움까지 느낄 수 있었
								[전선영의 시로 보는 마음 1] 저는 시를 통해 잃어버린 슬픔을 찾았습니다. 저는 누군가 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늘 똑같은 대답을 해요. “저의 꿈은 행복한 가정입니다. 그리고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라고요. 저는 어릴 적 한 부모 가정에서 자랐어요. 좀 특이했던 점은 엄마가 형편이 되면 엄마랑 살고 아빠가 형편이 되면 아빠랑 사는 한 부모 가정이었어요. 경제적인 문제와 서로의 성격차이, 서로가 용서할 수 없었던 부분 때문에 저희 부모님은 함께 결혼생활을 오래 유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모가 안전한 그늘이 되어주지 못할 때 아이는 아이다움을 포기하고 일찍부터 어른이 되는 가 봅니다. 저도 일찍부터 어른의 역할을 하느라 잃어버린 것들이 참 많은데 그 중 가장 마음 아픈 상실은 슬플 때 슬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마음이었어요.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에요. 어느 날 엄마가 저와 제 여동생을 세워놓고 “학교 갔다 오면 엄마가 없을 거야. 당분간, 둘이 의지하고 서로 잘 돌봐주며 지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아이처럼 떼를 쓰며 울어야 했는데 울지 않았습니다. “알겠어 엄마”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날 하교를 한 후 저는 엄마의